"산모님, 이게 병원에 남은 마지막 피예요. 이제 정말 피 흘리시면 안 돼요."
크리스마스 다음날이었다. 배미진(가명·34) 산모는 출산 직후 하룻밤에만 두 차례 기절했다. 최고혈압 60, 최저혈압은 40까지 내려갔다. 심한 자궁 출혈이 발생하면서다. 피가 멎어서 다행이었지만, 피가 멎지 않았더라면 그 새벽에 직접 헌혈자를 찾아 피를 받아와야 했다.
배 산모는 보건복지부와 대한수혈학회의 '2022년 수혈 가이드라인(제5판)'이 지정한 수혈 1순위 환자였다. '산과 출혈로 생명이 위험한 환자'여서다. 그러나 혈액난이 턱 끝까지 추격해오면서 최우선 순위 환자도 안심할 수 없게 됐다.
보건복지부는 '2022년 수혈 가이드라인'을 냈다. 이 가이드라인은 환자를 1·2·3순위 집단으로 나누고 수혈 순위를 권장한다.
하지만 배 산모처럼 1순위 고위험 산모들은 "병원에서 피를 우리더러 구해오라고 했다"고 말한다. 출산 특성상 수술을 미룰 수도 없는데, 배부른 산모가 출산 한두 달 전에 갑자기 '마감 기한 있는 숙제'를 부여받게 되는 셈이다.
정지연(가명·32)씨는 지난해 9월 경북 지역에서 가장 큰 계명대 동산병원에서 아기를 낳았다. 출산 한 달 전 정씨는 "코로나19 이후 병원도 피를 구하는 게 어렵다"며 "6명에게 지정헌혈을 받아오라"는 숙제를 받았다. 집 앞 의원급 병원도 아니고, 대학 병원에서 피가 모자란다는 게 정씨에게는 충격적이었다.
최다희(29)씨의 이모 이의경씨도 수혈 1순위 환자다. '항암 치료를 연기할 수 없는 환자'여서다. 항암 치료를 당장 시작하지 않으면 암 전이가 언제 다시 일어날지 모른다. 다만 항암 치료를 재개하려면 수혈을 함께 진행해야 한다. 항암 치료를 받는 순간 피를 만드는 조혈 기능이 떨어져 사망할 가능성이 있어서다. 한 번에 농축 적혈구 2팩 이상, 혈소판은 8팩 이상을 맞아야 한다.
그런데 최씨는 "병원에서는 주변에서 지정헌혈자를 찾아보라고 독촉했다"며 "과거에 도와준 사람은 오미크론 확진으로 헌혈이 어렵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이어 "이모가 살려면 '얼마나'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피가 많이 필요하다"며 "매우 암담하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수술과 치료를 앞두고 혈액이 부족할 경우를 대비해 1순위 환자들이 직접 헌혈자를 구해야 하는 상황이 의료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다. 헌혈할 때 피를 받을 사람을 미리 정하는 '지정헌혈'이 보편화된 셈이다.
애초 '지정헌혈' 제도는 RH- 혈액형 같은 희귀 혈액 부족 때를 대비하려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의료진에게 지정헌혈이 최후의 수단인 이유다. 그런데도 의료진은 최후의 수단을 최우선 순위 환자들에게 쓰고 있다. 환자가 혈액을 확보해오지 않으면 수술과 치료를 시도조차 못하는 '혈액난' 상황이어서다.
혈액 수급 위기를 관심·주의·경계·심각 4단계로 나누는 현 체계에서, 1순위 환자는 '심각' 단계에서도 수혈받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1순위 환자조차 수혈을 편하게 받을 수 없다. 그 말은 곧 현재 의료 일선의 혈액난이 '심각'보다도 심각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의 '혈액 수급 위기 단계'에는 특이한 지점이 있다. 의료 현장이 마비됐던 지난 2년 동안 '심각' 단계까지 이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 '관심' 단계를 유지하다가 '주의' 단계가 3회 발동된 게 전부였다. 의료 일선과 대한적십자사 관리 체계 사이에 괴리가 발생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되는 이유다. 대한적십자사가 위기 때 참고할 매뉴얼을 세워 놓고도 써보지 않았다는 얘기다.
임영애 아주대 진단검사의학과 교수는 "(적십자사의) 매뉴얼 발동이 안 된 상태에서 의료 기관에 혈액이 부족하다는 건 문제가 있다"며 "매뉴얼대로 100% 할 수 있는 일을 해보고 그래도 안 될 때 환자에게 지정헌혈을 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매뉴얼의 효과는 크다. 보건복지부가 2020년 5월 15일 1차로 긴급재난문자를 발송했을 때 2.6일분까지 떨어졌던 혈액보유량은 이틀 만에 4.8일까지 급상승했다. 2020년 12월 18일 2차, 지난해 11월 26일 3차로 발송된 재난문자도 단번에 5일분 이상으로 보유량 증대를 견인하면서 큰 효과를 거뒀다. 한송이 한마음혈액원 과장은 "긴급재난문자가 발송되자마자 각 혈액원 홈페이지가 다운될 정도로 관심이 뜨거웠다"며 "복지부가 국가 차원에서 계속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1순위 환자가 아닌 후순위 환자라고 혈액난에 버틸 만한 건 아니다. 이들 가운데는 백혈병과 백혈병 이행 가능성이 높은 골수형성이상증후군 등 환자들이 있다. 조혈모세포 이식을 받기 전까지 유지 요법으로 수혈을 택할 수밖에 없다. 적혈구나 혈소판 수치가 낮아지면 일주일에 2, 3차례까지 수혈받아야 한다.
병원에서 '무한 대기'를 하는 날도 적지 않다. 골수형성이상증후군을 앓고 있는 정주원(41)씨는 지난 3월 오전 9시에 병원을 방문했지만, 오후 6시 반까지 피를 기다려야 했다. 정씨는 "그마저도 다행인 경우"라며 "병원도 혈액원에서 피를 못 구했더라면 대안 없이 돌아가야 했다"고 말했다. 정씨는 이런 상황에 대처가 안 돼 오래 다니던 직장도 그만뒀다.
이 같은 상황은 의료진에게도 골칫거리다. 서울 시내 한 대형병원 혈액종양내과에서 근무하는 한 간호사는 "환자 수치가 너무 낮아도 혈액이 없어서 못 줄 때가 있다. 기다려도 피가 없으면 환자들이 노발대발한다"고 말했다. '무한 대기' 상황은 최근 오미크론 유행 이후 더 많아졌다. 오죽하면 담당의가 나서 환자에게 지정헌혈을 해주기도 했을까.
이에 병원들은 수혈 기준을 엄격하게 조정했다. 서울 시내 한 대형병원은 지난해 말 수혈 기준을 적혈구수치(Hb) 10 이하에서 8 이하로 조정했다. 한 간호사는 "원래 규칙으로 환자 Hb가 8 이하면 혈액은행에 수혈을 요청하지만, 병원 혈액보유량에 따라 7 이상이면 수혈할 수 없다고 임의로 결론을 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엄격해진 수혈 기준에 애가 타는 건 환자들이다. 당장 몸에서 변화가 생기기 때문이다. 정씨는 "빨간 피가 부족하면 이명이 오고 숨이 찬다"며 "수혈받을 때가 됐구나 생각이 드는데 정작 기준에 못 미쳤을 때 항상 불안하다"고 말했다.
김지연(가명·45)씨의 남편은 비정형적 만성골수백혈병 환자다. 김씨는 "혈소판수치가 4,000이면 기침만 해도 출혈이 생기는데 수혈을 넉넉히 못 받는다"며 "병원에서는 숨이 겨우 붙어있을 정도만 수혈을 해준다"고 말했다.
환자들이 지정헌혈에 간절해지는 이유다. 환자 자신이 노력해볼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어서다. 지난달 처음 병을 진단받아 벌써 10번째 수혈받은 정씨는 지정헌혈만 8번을 받았다.
마음은 간절해도 환자 대부분은 지정헌혈 준비에 어려움을 겪는다. 백혈병 병동에서 5년째 근무해온 한 간호사는 "10명 중에 4, 5명은 준비가 아예 안 된다"며 "보호자가 없거나 보호자도 고령일 때는 지정헌혈을 못 받아온다"고 말했다. 마지막 동아줄조차 잡지 못하는 셈이다.
◆글싣는 순서
① 혈액대란에 우는 환자들
② 서바이벌게임 된 지정헌혈
③ 미봉의 연속, 헌혈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