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퍼 루프'를 들어보셨나요. 6월 1일 전국 동시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낯선 단어입니다. 실현만 된다면 서울과 부산을 20분 안에 주파할 수 있다는 초고속 진공열차인데요. 각 지방자치단체가 도입하고 싶어 하는 '꿈의 사업'으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이 신기술이 광역 교통망에 혁신을 가져올 수 있다는 기대감이 부풀어 오르고 있는데요.
하이퍼루프를 대중에게 알린 이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입니다. 그가 2013년 처음으로 하이퍼루프라는 이름을 붙였고, 차세대 교통수단으로 띄워 화제가 됐어요. 이후로 하이퍼루프는 큰 관심을 얻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독자적으로 세계 최고 수준까지 개발 진전이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불확실성도 많기 때문에 실제 상용화에 이르기까지는 앞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해요.
하이퍼루프가 최근 주목을 받게 된 것은 경기지사 선거를 통해서입니다. 김은혜 국민의힘 후보는 4월 말 안철수 당시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을 만나 "인천공항과 고양을 15분 안에 주파하는 미래형 신기술이 필요하다"면서 하이퍼루프를 도입하겠다고 꺼냈는데요. 이에 대해 강용석 무소속 후보는 "하이퍼루프는 사기에 가깝다"며 "일론 머스크가 주장했지만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12일 열린 TV토론에서도 두 후보는 하이퍼루프 공약을 놓고 설전을 벌였어요. 강 후보는 김 후보를 향해 "하이퍼루프는 아직 일론 머스크도 제대로 못 만들고 있고 시속 1,500㎞(머스크는 1,200㎞로 언급)로 달리는 것"이라면서 "고양에서부터 인천공항까지면 1분 10초면 도착할 텐데 30분 만에 달리는 하이퍼루프는 뭐냐"고 따져물었습니다.
김 후보가 발표한 공약은 의정부에서 고양을 걸쳐 인천공항까지 30분이기 때문에 강 후보의 질의 자체는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김 후보는 또렷하게 대답을 하지 못했어요. "자율주행차는 10년 전에 누가 생각했겠나. 판교 테크노밸리도 마찬가지다. 누구든지 꿈꾸는 자가 현실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한다"라는 답변으로 대신했습니다.
강 후보는 다시 "물리를 조금만 공부해 보면 현실에서 진공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 것"이라면서 "그게 언제 될지도 모르는데 (경기지사) 임기 4년 내에 가능하겠느냐. 굳이 하이퍼 루프를 해야 하냐"고 몰아붙였습니다. 강 후보 캠프의 김소연 수석대변인도 "공약의 실현 가능성과 실현 방법을 물었더니 꿈을 꾸면 이뤄진다는 허무맹랑한 답변을 한 것"이라고 꼬집기도 했죠.
김 후보와 강 후보의 '설전'을 보면 ①김 후보가 도입하고자 하는 것은 하이퍼루프가 맞는지 ②애초에 그 기술이 당장 실현은 가능한지가 쟁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요.
하이퍼루프는 차세대 교통수단으로 거론되는 방안 중 하나인 '초고속 진공열차'를 가리킵니다만 그 이후로 유사한 개념의 교통수단에는 하이퍼루프란 이름이 대명사처럼 쓰이고 있습니다.
머스크가 제안한 하이퍼루프는 지하에 진공 상태의 튜브를 설치하고 그 안에서 달리는 교통수단이에요. 이론적 근거는 진공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마찰이 거의 발생하지 않고, 이에 따라 비행기보다 빠른 시속 1,200㎞ 이상으로 달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 서구에서는 크게 머스크와 밀접한 관계의 오픈소스 개발팀 하이퍼루프교통기술(HTT)과 버진 그룹이 주도하는 '버진하이퍼루프원' 등이 대표적인 선두주자로 꼽혀요.
이 중 하이퍼루프원은 2016년 5월 미국 네바다주에서 1㎞를 달리는 공개 테스트를 마쳤고 2020년 11월에는 유인 시험운행을 실시했습니다. 유인 운행의 경우에는 총 거리가 500m, 속도는 음속의 10분의 1을 간신히 넘는 시속 172㎞에 머물렀기 때문에 애초의 구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성능이에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버진은 최근 여객 분야를 포기하고 화물 운송수단으로서 진공 열차를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사람을 태우고 초고속으로 운행하기에는 안전 문제가 여전히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인데요. 예를 들어 진공 터널 내에서 사고가 발생해 인명에 위기가 있을 경우 승객이 탈출하기도, 의료진이 접근하기도 어렵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또 머스크가 설립한 '굴파기 회사'인 보링컴퍼니는 하이퍼루프가 아니라 기존의 전기차를 지하 터널을 통해 빠르게 수송하는 '루프'의 개발에 집중하고 있어요. 한때 머스크는 미국 서부 해안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 동부 해안 워싱턴과 뉴욕을 잇는 하이퍼루프 건설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상 큰 진전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머스크의 보링컴퍼니는 하이퍼루프 계획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후순위 사업으로 미뤄두고 있어요.
서구의 분위기를 보면 강 후보의 주장처럼 하이퍼루프를 도입하겠다는 김 후보의 주장은 현실성이 떨어지는 소리로 보입니다. 그런데 하이퍼루프 공약을 내세운 지방자치단체장 후보는 김 후보가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4·7 재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박형준 부산시장이 '공약 1호'를 도시 내 초고속 진공열차 도입으로 내세웠기 때문이에요.
국내에서는 머스크가 '하이퍼루프'란 이름을 붙이기도 전인 2009년부터 한국철도기술연구원에서 하이퍼튜브(HTX)라는 명칭으로 기술 개발을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 철도연에서 독자 기술로 개발한 것은 '아진공 튜브'인데요. 진공 상태는 아니지만, 튜브 내부를 주행하는 캡슐 차량의 공기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튜브 내부를 1,000분의 1기압 이하로 낮출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기술 개발 속도는 하이퍼루프란 이름을 붙인 머스크 등 서구의 개발 속도보다 빠르다는 평가를 받았어요. 박근혜 정부의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이었던 최양희 한림대 총장은 장관 재임 당시 "일론 머스크의 하이퍼루프를 뛰어넘는 캡슐 차량 개발을 적극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어요.
부산시는 이 기술을 활용해 가덕 신공항과 부산 동부까지를 연결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2022년까지 기초연구, 2024년까지 예비타당성 조사, 2030년 실제 개통이 목표라고 해요. 머스크 등이 목표로 하고 있는 시속 1,200㎞가 바로 나오는 것은 아니고 시속 300㎞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김 후보의 '의정부에서 인천공항까지 30분'이라는 하이퍼루프 공약도 사실상 박형준 부산시장의 어반루프 공약을 모델로 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외에도 경상남도, 전라북도, 충청북도 등이 초고속 진공열차 시범단지 유치에 나서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처럼 국내 지자체장 후보들이 분위기를 한껏 띄웠지만 실상 하이퍼루프의 예상되는 상용화 시기는 계속 뒤로 밀리고 있어요.
포스코경영연구원은 2016년에 하이퍼루프원의 네바다 시험 성공 이후 "2020년 안에 하이퍼루프 상용화가 가능할 수 있다"는 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버진하이퍼루프는 유인 운행 시험이 성공한 2020년에도 여객 용도로 하이퍼루프를 운행하는 것은 2030년에나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봤어요.
외부의 시선은 더 차갑습니다. 첨단기술 전문 리서치기업인 럭스리서치는 같은 해 "진공 기술을 실현하는 데 막대한 비용이 예상된다"면서 하이퍼루프의 경제성 자체에 물음표를 달았어요. 물론 대규모 교통 인프라 사업이기에 정부의 지원이 병합된다면 실현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마저도 2040년쯤에나 실현이 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부산시의 구상인 어반루프에 대해서도 비슷한 문제 제기가 있었어요. 박 시장은 어반루프 용역 사업비를 책정했지만 민주당이 다수인 부산시의회가 적합하지 않다며 이를 한동안 용인하지 않아 갈등을 빚었습니다.
지난해 10월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부산시 국정감사에 나선 임호선 민주당 의원은 "어반루프는 하이퍼루프의 기술이 접목되는 상황인데, 빠른 교통수단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기술의 현실성이 있는지는 재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어요.
이에 박형준 시장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면서 "어떤 형태로든 15분 안에 동·서 부산을 연결하는 교통수단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라고 답했습니다. 공약의 배경으로 내세운 것은 하이퍼루프였으되 정작 실제 어반루프는 하이퍼루프가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