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한 페퍼포그차(최루탄 발사 차량)에 올라 카메라를 날카롭게 응시하던 사진 속 젊은 남성.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시민군의 강렬한 표상이었고, 그의 신원을 밝히려다 실패한 추적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 미지의 이름을 얻은 '김군'이었고, 보수논객 지만원씨가 북한특수군 광주 침투설의 근거로 가장 먼저 지목한 '광수 1호'였던 그는 마침내 차복환(62)씨로 밝혀졌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진상조사위)가 지난해 10월 다른 기관에서 차씨 본인 제보를 전달받은 뒤 최면조사까지 동원한 다각적 확인 작업을 거쳐 12일 차씨가 바로 김군이라고 세상에 공개하는 동안, 한국일보 역시 지난 6개월간 독자적으로 김군의 신원을 찾으려는 노력 끝에 차씨에 가닿을 수 있었다. 차씨에 앞서 김군으로 유력하게 지목됐던 시민군의 사망 경위를 뒤쫓다가 막다른 골목에서 새로운 김군을 발견한 반년의 여정이었다.
한동안 김군은 1980년 5월 24일 광주 송암동·효덕동 일대에서 계엄군이 자행한 집단학살 사건 때 피살된 것으로 추정됐다. 이런 가설엔 김군의 시민군 동료였던 최진수(59)씨의 증언이 유효하게 작용했다. 최씨는 2020년 광주공원에 사비를 들여 김군 동상을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그날 육군 보병학교 교도대가 광주비행장으로 이동하던 11공수여단을 시민군으로 오인 사격하면서 사상자가 여럿 발생했다. 시민군 공격으로 오해한 11공수여단은 분풀이 격으로 인근 주민을 집단 학살했는데, 최진수씨를 포함한 시민군 일행은 총격을 피해 주변 민가로 피신했다가 발각됐다. 이 과정에서 최씨와 같은 집에 숨었던 시민군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가 바로 김군이자 광수1호로 지목된 사람이라는 게 최씨 주장이었다.
최씨는 1989년 2월 22일 국회 제28차 5·18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광주특위) 청문회에 출석해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군인들이) 바로 집단구타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동료 시민군의) 관자놀이에 대고 M-16으로 그냥 쏴버렸다. 그 친구는 죽었다. 이름은 김모씨"라고 증언했다.
본보는 지난해 10월 송암동·효덕동 학살 사건을 목격한 동네 주민들을 인터뷰했다. 최씨가 피신한 민가에 살았던 문모(79)씨는 "시민군들이 집에 들어오니까 시아버지가 '살고 싶으면 총 감춰야 한다'고 했다"며 "천장을 뜯어 총을 감췄고, 다들 방에서 이불 덮고 숨어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설명했다.
문씨 집으로 들이닥친 계엄군들은 붙잡힌 4명 중 1명을 사살했다. 문씨는 "군인들이 집을 둘러쌌는데, (시민군들이) 마당으로 나오니까 끌고 가서 도로가에서 총으로 쐈다"고 기억했다. 최진수씨 증언과 상당히 유사한 설명이다. 문씨는 다만 그때 사살된 김씨 성을 가진 이의 얼굴은 기억하지 못했다. 페퍼포그차를 탄 김군 사진을 보고도 "누구냐. 전혀 모르겠다"고 말했다.
최씨의 증언에 힘입어 오랫동안 김군이 아닐까 여겨졌던 이의 정체는 송암동·효덕동 학살로 희생된 시민군 신원이 확인되면서 자연스럽게 밝혀졌다.
광주 남구 의뢰로 조선대 산학협력단이 지난 2월 발간한 '5·18 송암동 및 효천역 일원 양민 학살 문헌조사 최종보고서' 사망자 명단에 따르면 효덕동 일원에서 5월 24일 김종철(사망 당시 10대)군이 숨졌다. 그가 바로 최씨가 말한 '김군'이었다. 김종철군은 1980년 작성된 광주지검 시체검안서에 5월 24일쯤 사망한 신원미상자로 적혔고 사인은 타박상과 자상으로 기록되는 바람에 오랜 기간 신원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진상조사위도 검시보고서와 주변인 진술, 현장 조사 등을 토대로 효덕동에서 사망한 시민군이 김종철군이라는 점을 확인하고 12일 발표했다. 위원회는 다만 김종철군이 현장에서 바로 사살됐다는 최진수씨 등의 증언과 달리 계엄군에 연행되던 도중 사살됐다고 결론냈다. 당시 계엄군으로 활동했던 이들을 면담조사한 결과였다.
김종철군이 사진 속 김군이 아니라고 판명되고 있을 무렵 한국일보는 광주 일대를 취재하던 중 자신이 김군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정보를 입수해 확인에 나섰다. 사실이었다. 지난해 5월 광주에 있는 5·18기념재단에 본인이 바로 김군이라고 밝힌 제보자가 있었던 것이다. 바로 차복환씨였다.
차씨는 그달 다큐멘터리 영화 '김군'(감독 강상우)을 보다가 영화에서 김군으로 지칭되는 사진 속 인물이 광주 시민군에 가담했을 당시 자신이란 사실을 확인했다고, 아울러 자신이 '광수 1호'이자 '북한 농업상 김창식'이라는 낭설이 돌고 있음을 처음 알았다고 재단에 밝혔다. 재단은 그해 10월 서울에 있는 진상조사위에 차씨의 제보 사실을 알리고 확인을 요청했다.
본보는 김군 사진을 찍은 이창성씨(당시 중앙일보 기자)와 차씨의 증언을 교차 검증했다. 그 결과 촬영 시점, 장소, 당시 상황 등에서 두 사람 증언이 상당 부분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씨는 페퍼포그차에 오른 김군의 사진을 5월 22일에 찍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일각에선 그 사진이 5월 23일에 촬영됐다는 주장이 나오지만, 이씨는 "23일엔 사진을 많이 못 찍었고 찍을 만한 상황도 별로 없었다"며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 차씨 또한 5월 22일을 끝으로 시민군을 떠났다고 기억했다.
이씨가 회고하는 김군 사진 촬영 경위. 22일 새벽 전남도청에 마련된 시민군 지휘본부에 가서 시민군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해 허락을 받은 이씨는 시민군 지프차를 얻어타고 도청 인근을 취재했다. 당시 스물한 살로 석 달 전 광주에 와서 공장에 다니다가 시민군에 합류한 차복환씨는 이씨 카메라에 여러 차례 포착됐다. 페퍼포그차에 탑승한 모습은 금남로4가, 다른 모습은 금남로1가 근처에서 찍혔다고 한다.
이씨는 "페퍼포그차가 흔치 않아서 카메라에 잡힐 수밖에 없는데 그 사람(차복환) 모습이 독특했다"며 "총탄도 걸고 있고 매서워 보였다"고 회상했다. 이씨는 최근 진상조사위 조사 과정에서 차씨와 조우했다고 한다. "죽은 줄 알았던 사진 속 인물을 만나 감회가 새로웠어요. 눈빛이 사진 찍혔을 때와 비슷하던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