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독재자 가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64) 당선인의 앞길은 순탄치 않아 보인다. 당장 투표 절차의 공정성을 문제 삼는 잡음이 커지는 데다, 필리핀을 21년간 철권통치한 선친의 부정축재 자산에 대한 상속세 문제가 남아 있는 탓이다. 현지에선 마르코스 당선인이 차기 대권을 노리는 로드리고 두테르테 현 대통령의 딸 사라 두테르테 부통령 당선인을 통제하지 못할 경우, 임기 중 탄핵당할 가능성까지 조심스럽게 제기하고 있다.
10일 필리핀 외교가와 현지 매체를 종합하면, 대선 투표가 진행된 전날 전국의 투표기 1,900여 대가 순차적으로 고장을 일으켰다. 이에 유권자들은 수도 마닐라를 포함해 전국의 투표소 앞에서 기기가 수리될 때까지 대기해야 했다. 소식을 들은 지지율 2위 레니 로브레도 후보 측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항의하며 투표 시간 연장을 요구했다. 그러나 선관위는 "예측할 수 없었던 사고일 뿐"이라며 일부 지역에서만 추가 투표를 허용했다. 필리핀 대선은 광학마크판독기(OMR) 카드에 기재된 지지 후보 칸에 색칠을 하면, 투표기가 이를 인식해 데이터화하는 절차로 진행된다.
투표기 고장 논란은 향후 더 커질 공산이 크다. 기기 공급업자가 두테르테 대통령의 측근이기 때문이다. 로브레도 후보도 이날 "많은 유권자들이 정권의 선거 부정행위를 의심하고 있다"며 "이번 선거 과정에 대한 문제 제기는 꼭 필요하다"고 밝혔다. 야권은 개표 및 검표 절차가 종료되면 대규모 항의 집회와 관련 소송을 진행할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2016년 부통령 선거에서 마르코스 후보는 접전 끝에 로브레도 후보에게 패하자 같은 방식으로 선거 결과에 불복한 바 있다. 6년이 흐른 뒤, 공수만 바뀐 정국 혼란이 반복되는 셈이다.
마르코스 당선인의 상속세 문제도 정권의 '아킬레스건'이 될 전망이다. 마르코스 당선인은 부친이 부정축재한 100억 달러(한화 12조7,000억 원) 자산의 상당 부분을 상속받은 상태다. 문제는 세금을 현재까지 납부하지 않고 버티고 있다는 점이다. 전임 정권들이 바른정부위원회(PCGG)를 통해 1,710억 페소(4조 원)의 자산을 환수했으나, 현지에선 마르코스 당선인이 PCGG조차 파악하지 못한 거액의 자산을 더 갖고 있을 것으로도 보고 있다.
상속세 문제는 차기 대권 구도와 연결돼 복잡한 양상으로 흐를 공산이 크다. 이번 대선 승리의 1등 공신인 다른 유력 가문들의 존재 때문이다. 에스트라다ㆍ마카파갈ㆍ아로요 가문이 마르코스 가문과 함께 탄생시킨 정권에서 요직을 보장받지 못할 경우 상속세를 타깃으로 문제 삼고 대통령을 흔들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핵심 인물은 에스트라다 가문 등과 가까운 '차기 대권주자' 사라 부통령 당선인이다. 그가 유력 가문들과 공동 전선을 구축하기로 결심하면, 대통령 탄핵은 압박카드가 아닌 대통령 하야를 겨냥한 실질적인 무기로 쓰일 수 있다. 사라 부통령 당선인은 남부 다바오 시장 재임 시절부터 직설적인 화법과 강력한 카리스마로 전국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그는 이번 비공식 대선 개표 집계에서 부통령 선거 2위 후보보다 3배 이상 많은 표를 얻었다.
필리핀 외교가 관계자는 "필리핀 대통령 탄핵 발의안의 관건은 하원의장이 쥐고 있다"며 "에스트라다 등 동맹가문 혹은 사라 부통령 당선인 계열의 인사가 하원의장을 맡을 경우 마르코스 정권은 탄핵의 위험을 안고 임기를 시작하는 셈"이라고 분석했다. 필리핀 차기 하원의장은 오는 7월 셋째 주로 예정된 신임 대통령의 의회 연설 직전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