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지역은 항상 글로벌 국제질서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해 왔다. 제1차 걸프 전쟁은 소련 붕괴 이후 미국 주도의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가 도래했음을 알린 탈냉전 시대 첫 번째 전쟁이었다. 오늘날 중동은 새로운 국제질서를 맞이하고 있다. 미국의 패권적 지위가 쇠퇴하고, 중국과 러시아의 침투가 가시화된 다극체제로 전환되는 양상이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중동 다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음을 새삼스레 깨닫게 한다. 미국의 전통적 동맹국들은 워싱턴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러시아와의 갈등을 피하고자 노력했다. 아랍에미리트(UAE)는 유엔에서 러시아 비판 결의안에 기권했고, 이집트와 이스라엘 역시 푸틴 때리기에 동참하지 않았다.
사우디아라비아는 100달러를 돌파한 고유가 행진을 멈추고 러시아에 재정적 압박을 가하기 위해 유가 조정자 역할을 해 달라는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제1차 걸프 전쟁 당시 여론의 반발을 무릅쓰고 미군의 주둔을 허락했다는 측면에서 참으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거기에 한술 더 떠 사우디아라비아는 중국으로 수출되는 원유 대금의 위안화 결제 가능성을 협의하며 미국의 불편한 심기를 건드렸다.
중동 다극체제의 형성은 미국의 탈중동 기조 속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중동 진출이 속도를 낸 결과이다. 중국과 중동 국가 간 경제 협력은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 베이징의 대중동 무역 규모는 미국을 한참 추월했고, 중동 각국에 대한 투자가 큰 폭으로 증가했다. 중국은 소위 '발전평화론(developmental peace)'을 외치며 중동 진출에 적극적이다. 반면 시리아 군사 개입에 성공하면서 한층 자신감을 얻은 러시아는 중동 국가와의 정치안보 분야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특히 푸틴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이집트를 중심으로 중동 진출에 나서고 있다.
중동 국가들은 변화하는 국제질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강대국 경쟁 구도에 휘말리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하지만 싫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동안 일관성 없는 미국의 정책에 실망했던 중동국가들은 새로운 지역질서 창출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 다극화된 세계에서 강대국 경쟁 구도를 활용해 더 큰 실익을 얻을 수 있다는 계산도 깔려있다. 중국과 러시아의 중동 문제 개입 확대를 레버리지로 활용한다면 중동에서 손절하려는 미국을 붙잡고, 추가적인 안보 지원을 받아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한편, 중동 국제체제의 변화는 강대국과 함께 국제사회의 중견국들이 중동 문제에 관여할 정치적 공간을 넓혀줄 개연성이 있다. 강대국 정치의 일방주의를 견제하면서 중동 문제 해결에 건설적 역할을 수행할 중견국들의 참여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장기적 차원에서 남북 관계와 한반도 문제를 뛰어넘어 중동 이슈에 관여하기 위한 외교 전략을 고민해 볼 시점이 되었다.
때마침 출범하는 윤석열 정부는 북핵과 한반도 차원을 넘어서서 국제무대로 외교적 지평을 확대하겠다는 글로벌 중추국가를 지향하고 있다. 이에 윤석열 정부의 글로벌 확장 외교를 중동 지역까지 넓히는 방안이 필요하다. 포스트 오일시대를 준비하며 산업 다각화에 나선 중동 산유국들은 물론 정치 불안정 속에 경제 재건이 필요한 중동 국가들 모두 단기간에 경제 발전에 성공한 우리와의 협력을 중시한다. 무엇보다 중동지역은 미국의 외교 우선순위에 놓여 있으므로 한미동맹의 차원에서 한국이 중동 안정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한 노력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