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김천 한 마을에 슈퍼맨들이 살고 있다

입력
2022.05.07 09:40
4.5m배수로 추락 사고에도 멀쩡한 어르신들 
김천시 남면 초곡리 배수로서 사고 
"슈퍼맨 배출은 단연코 더 이상 NO"



경북 김천 시민들 중에는 "남면 초곡리에는 슈퍼맨들이 살고 있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얘기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60~90대의 어르신들이 각기 다른 농기계를 몰고 가다 4.5m 높이의 배수로 아래로 떨어졌음에도 중상에서 비켜갔기 때문이다.

사고가 잇달아 난 현장은 젊은이라도 생명을 잃거나 치명상을 당할 수 있는 곳. 그럼에도 불행 중 다행의 결과가 된 것은 "이들 어르신들이 슈퍼맨처럼 공중을 날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유머러스하게 해석들을 하는 것이다. 사고가 연이어 난 곳은 동김천 IC 인근 포도 하우스 서쪽 측면 차량 1대가 겨우 지나 갈수 있는 농로에서 발생했다. 이 농로는 폭 2m, 높이 2.5m에서 5m의 남북을 가로지르는 배수로를 끼고 있다.

비교적 유동인구가 많은 인근 큰 길 주변 배수로에는 가드 레일이 설치되어있으나, 사고 주변 직선거리 150m 구간에는 가드 레일이 없다. 가드 레일이 없는 이곳에서 사고가 난 것이었다.

마을 첫 번째 슈퍼맨은 약 2년 전 출연했다. 70대 할머니 한분이 자전거를 타고 가다 배수로 위를 '날았다'. 사고를 목격한 이들은 큰일 났다고 현장으로 달려갔지만 할머니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냥 툴툴 털고 걸어 나오셨다. 그리고는 걸어 나와 가던 길 계속 갔다고 한다.

지난해 7월에는 같은 장소에서 마을 두 번째 슈퍼맨 김성기(90) 할아버지가 경운기를 타고 가다 4.5m 높이의 배수로로 떨어졌다. 경운기가 수직으로 꼽히는 대형 사고였다. 수확한 감자를 경운기에 한가득 싣고 내리막을 내려오면서 속도를 줄이지 않은데다 클러치를 반대로 잡은 것이 화근이었다.

김 할아버지는 경운기에 깔리지도 부딪치지도 않았다. 운 좋게도 튕겨져 나와 화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머리를 심하게 다쳐 출혈이 심했다. 그럼에도 혼자 배수로를 빠져나와 구급 요청을 했다. 지금 돌이켜 보아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침착하게 대처를 한 셈이었다.

동네 주민 이 모씨는 사고 몇 시간 후 경운기를 인양하러 온 대형견인 차량을 보고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어르신의 명복을 빌며 마을 장례식을 준비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얼마 후 논에서 일하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지금도 김성기 할아버지는 과수원과 논농사를 병행한다. 손수 1.5톤 트럭과 경운기, 트랙터를 몰며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다만 10년 전 다친 허리가 최근 도져 지팡이를 짚고는 있지만, 일을 하는 데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김성기 할아버지는 새벽 4시에 일어나 해질 때까지 일하는 것이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라고 말한다.

가끔 찾아오는 손자 손녀들을 보는 즐거움이 마음의 건강을 선물하고 이것이 육체적 건강으로 연결된다고. 특히 손자는 이번에 서울 모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아 더욱 큰 기쁨을 안겨주었다고 자랑한다.

가장 최근 '슈퍼맨'에 등극한 이는 지역 주민 이영규(68)씨. 지난 3월24일 미니 포크레인으로 하우스 작업하던 중 포크레인에 탄 상태로 배수구 아래로 떨어졌다. 이 씨는 사고 직후 인근 김천 제일 병원과 타 병원에서 2주간 입원 치료를 받았으나 지금은 퇴원 후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



경북 김천시 남면 초곡리는 겉으로 보기에 여느 시골 마을과 별반 다를 것 없어 평화롭기만 하다. 그러나 2년 전부터 예사롭지 않은 일들이 연이어 발생,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그나마 더 큰 불행으로 연결되지 않아 주민들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

주민들은 자칫 큰 불행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던 사고가 그나마 그 정도 선에서 그칠 수 있었던 것은 마을 주작물인 포도 덕분이라고들 말한다.

김천은 포도 재배지로 유명하다. 대표 작물 ‘샤인 머스켓’은 그 맛과 품질이 이미 국내를 넘어 세계인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있다.

김성기옹과 이영규씨는 "인근 주민들이 우리들을 슈퍼맨이라고들 하는데 이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면서 "주민들 사이에는 샤인 머스켓을 먹으면 액운이 피해간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헛된 말은 아닌 것 같다"고 크게 웃었다.

김천 남면 위성충(60) 면장은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지역 주민들이 안전을 위해 추경에 가드레일 설치비용 반영을 마쳤다. 더 이상 지역에서 슈퍼맨이 출몰한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가드레일 설치를 4월 중으로 마무리 하겠다"고 말했다.

박상은 기자 subutai1176@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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