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합재질(other) 플라스틱으로 만든 2㎝ 두께의 화장품 용기가 있다. 복합재질은 재활용이 어렵기로 유명하다. 프랑스에서는 이 재질 용기를 생산한 기업에 1㎏당 약 636원(0.47유로)을 부담시킨다. 한국(354원)보다 두 배가량 책임을 지운다.
그런데 프랑스 정부는 소재의 사용량이 줄어들면 책임 비용(분담금)을 약 8% 할인해 준다. 용기의 두께를 조금 더 얇게 만들어 플라스틱 양을 줄인다거나, 낱개 포장을 합쳐서 비닐 사용을 줄이는 경우를 뜻한다. 이렇게 할 경우 포장재 무게 감소로 분담금이 저절로 줄어들지만 여기에 더해 추가로 8%를 깎아주는 것이다. 나아가 재활용 용이성 가이드라인에 따라 제품을 개선할 경우 '재활용 의식 증대' 명목으로 약 4~8%를 낮춘다.
즉 프랑스에서는 두꺼운 플라스틱과 얇은 플라스틱을 쓸 경우, 그 차이에 대해 기업에 확실한 금전적 불이익이나 혜택을 주는 것이다.
이에 비해 한국의 생산자책임재활용(EPR) 제도는 경직적이고 상벌의 원칙이 거의 없다. 지난해부터 시행된 포장재 재질·구조 평가제도를 보자.
이 제도는 포장재의 재질과 구조에 따른 재활용 용이성을 최우수·우수·보통·어려움 4단계로 나눈다. 어려움 등급으로 평가될 경우 용기에 '재활용 어려움'이라는 표시를 해야 한다. EPR 분담금도 10~20% 더 내도록 했다. 플라스틱 용기에 금속 테두리가 붙어 있거나, 스티로폼 상자에 직접 인쇄가 된 경우 또는 유색페트병 등이 재활용 어려움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는 재질에 대한 규제일 뿐 사용량을 줄이도록 유인하지 못한다. 특히 복합재질의 경우 플라스틱 합성수지 재질에 알루미늄 등 다른 재질이 병합된 것이 아니라면 재활용이 용이한 걸로 간주된다. 복합재질 플라스틱은 다른 재질이 붙어 있지 않아도, 그 자체로 물질재활용이 거의 안 되는 골칫거리인데도 말이다. 물질재활용뿐만 아니라 태워서 연료로 쓰는 에너지재활용 등도 재활용에 해당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플라스틱 제품 생산 시 원료의 일부를 재생원료로 쓰도록 의무화하는 제도도 한국은 뒤처져 있다. 현재는 석유에서 추출한 플라스틱 순원료만을 사용해 포장재를 만든다. 여기에 이미 사용한 플라스틱으로 만든 재생원료를 혼합한다면 플라스틱의 추가 생산을 줄일 수 있다. 재생원료 사용량이 늘 경우 재활용산업 안정에도 도움이 된다. 재생원료를 판매할 곳이 없어 분리배출품 매입이나 수거를 중단하는 일은 줄어들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선 현재 재생원료 사용규제는 종이나 철, 유리에만 해당된다. 환경부는 그나마 2023년부터 플라스틱 제조업체에도 재생원료 사용의무를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재활용이 비교적 용이한 페트의 경우 2023년부터 30% 이상 재생원료 사용 의무를 부과하고, 올해 중으로 재생원료 사용비율을 제품에 표시하도록 하는 근거규정을 만들겠다는 설명이다.
정부의 계획은 해외에 비해 늦은 감이 있다. 유럽연합(EU)은 지난해부터 재생원료가 사용되지 않은 포장재에 ㎏당 0.8유로의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도 올해부터 플라스틱 음료 포장재에 재생원료를 15% 사용하도록 규제하고 있다.
한국에선 과대포장을 막는 직접 규제인 '포장공간비율' 규제도 허술하다. 전체 포장 중 내용물 등을 제외한 빈 공간이 일정 비중 아래여야 한다는 규제인데, 화장품은 10% 이하, 세제류는 15% 이하, 제과류는 20% 이하여야 한다. 수치만 보면 적절해 보이지만 측정방법에서 수많은 예외 기준이 있어서, 2·3겹에 이르는 한눈에 봐도 명백한 과대포장이나 3㎝ 두께에 이르는 화장품 플라스틱 용기도 기준을 충족한다.
홍수열 자원순환사회연구소 소장은 “하나의 정책수단으로는 생산단계에서의 포장재 사용 감량을 유도하긴 어렵다”며 “다양한 직접 규제가 같이 강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플라스틱의 나라, 고장난 EPR
<1>플라스틱 쏟아내도 푼돈만 부과
<2>벌칙금조차 너무 적다
<3>부족한 비용은 세금으로
<4>누더기 산정 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