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히트의 철학과 가치의 중심은 팬과 콘텐츠다."
지난 2020년 빅히트(현 하이브) 레이블즈 기업 설명회 당시 방시혁 의장이 한 말이다. 이듬해 빅히트엔터테인먼트가 하이브로 사명을 변경하고 다양한 사업 분야를 확장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도 이들이 말한 기업의 가치는 팬들을 향해 있었다. 신영재 빅히트뮤직 대표 역시 앞서 빌보드와의 인터뷰를 통해 "팬과 아티스트가 계속해서 소통할 수 있는, '팬 중심의 산업 생태계'가 목표"라고 강조한 바 있다.
소속 아티스트인 그룹 방탄소년단을 필두로 글로벌 K팝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이들의 '팬 중심' 가치관은 언뜻 이들의 위상에 걸맞는 이상적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하이브의 행보를 조금 더 들여다 보면 이들이 강조해온 철학이 꽤나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그 어떤 K팝 기획사 보다도 '팬 중심 문화 정착'에 대한 의지를 강력하게 드러내 온 하이브건만, 팬들의 반응은 어쩐지 날로 악화되고 있다. 최근에는 하이브의 행보에 실망감을 드러내며 '손절'에 나서는 팬들도 늘어나는 중이다. 하이브가 강조한 철학과 방향성에 대한 아이러니함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과연 무엇이 이처럼 극명한 입장 차이를 만들었을까.
팬들이 말하는 하이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소통의 부재'에 있다. 팬과 아티스트의 소통, 팬 중심 산업 생태계 등을 강조했음에도 정작 소속 아티스트를 지지하는 팬들에게는 '불통의 아이콘'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은 당황스럽다.
작게는 소속 아티스트의 의상이나 퍼포먼스 등과 관련된 문제부터 크게는 병역 문제, 멤버들의 개인 신변과 관련된 문제까지 팬들이 하이브의 고질적인 불통 행보를 지적하는 사례는 상당하다.
현재 방탄소년단 팬덤 아미(ARMY)의 집단 해명 요구를 받고 있는 이진형 CCO의 기자간담회 발언 관련 이슈도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지난 10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방탄소년단의 콘서트 기간 중 취재진을 대상으로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 이 CCO는 병역 이슈와 관련해 "병역 제도가 변화하고 있으나 결론이 나는 시점을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멤버들이 힘들어 하는 건 사실"이라며 병역법과 관련해 국회의 조속한 결론을 촉구했다.
해당 발언 이후 팬들은 멤버들이 수차례 병역 이행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 왔음에도 하이브가 병역법 개정을 촉구하는 발언에서 아티스트를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 이로 인해 비판적 여론이 방탄소년단 멤버들에게 집중됐다는 점을 지적했다. 특히 이번 사태가 커뮤니케이션 총괄의 실언에서 비롯됐다는 점은 비난을 키웠고, 팬들은 하이브의 공식 사과 및 입장 표명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거센 팬들의 항의에도 하이브의 선택은 침묵이었다. 해당 발언으로 방탄소년단과 그들의 병역 이슈를 향한 여론이 악화된 것은 사실이었지만 하이브는 별다른 입장 표명 없이 입을 닫았다. 지금것 팬들과의 소통을 회사의 철학으로 내세워왔던 것과는 상반되는 선택이다.
물론 소속사 입장에서 무수히 많은 팬들의 니즈를 일일이 파악하고 반영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다수의 팬들이 공통적으로, 또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피드백(혹은 시정)을 요구하는 이슈에도 최소한의 입장 표명 없이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은 소속사로서의 직무 유기다.
결국 보기 좋은 이상향을 기업의 철학으로 내세웠지만 정작 현실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며 아이러니함만 낳은 모양새다. 물론 하이브가 팬 중심 문화 확대를 꾀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체험형 이벤트, 양질의 콘텐츠의 다양화 등이 K팝 시장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 역시 무시할 순 없다.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팬들과의 소통이 부재한다는 것은 실로 아쉽다.
물론 사업분야의 다각화로 회사의 외연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 하이브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들의 본질이 결국 음악과 아티스트, 그리고 팬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중소 기획사로 꼽혔던 빅히트엔터테인먼트가 종합 엔터사인 하이브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기까지 가장 큰 원동력이 된 것은 결국 팬덤의 힘이었다. 계속되는 실망 속 팬들이 떠나간 자리에는 음악도, 아티스트도 튼튼한 뿌리를 내리기 어렵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하이브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방향성과 본질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