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방학 때마다 결심을 한다. 내 수강학생들의 성적 처리를 미루지 말자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결심 따위는 하지 말았어야 했다. 중간고사가 끝난 지 일주일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채점을 하지 않고 있다. 분명, 지금 하지 않으면 여름방학에 돌입하자마자 채점 지옥에 빠져 허우적거릴 것이 뻔한데도 채점을 외면하고 있는 중이다. 아닌 말로 결정장애를 앓고 있는 것인지, 나는 주관식 서술 문제에 점수를 매기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다. 물론 기계적으로 채점을 하면 되겠지만, 도무지 그 기계적인 처리가 되지를 않는다. 그래서 지난 겨울방학 때 성적 처리 하는 데만 3주의 시간을 소요했다. 그러니 매번 결심을 할 만하다. 실은 성적이 누군가의 인생에 영원히 남을 기록이라는 생각에 편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선생이 되기 전에는 미처 몰랐던 일이다.
사실, 선생이 되었을 때 정했던 원칙이 있다. 바로 성적 처리를 공정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원칙을 제대로 지킨 적이 한 번도 없다. 보통 성적은 출석점수와 과제점수 그리고 중간고사 성적과 기말고사 성적 등을 합산해서 산출하는데, 꼭 마음이 약해져서 버티다가 막판에 점수를 올려주는 일이 다반사다.
그런데 그런 경우는 심적 갈등이 덜한 편이다. 심적 갈등이 가장 극대화될 때는 졸업 예정자가 성적 이의신청을 할 때다. 이는 대학 졸업 여부와 관련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웬만하면 학생들이 성적 이의신청을 할 수 없도록 최선을 다해서 학생들의 모든 시험의 답안지와 과제에 피드백을 해준다. 그러면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만 성적 이의신청이 들어온다. 그럼에도 들어온 성적 이의신청은 평가 이유를 조목조목 알려줌으로써 성적 정정의 가능성을 원천봉쇄한다. 실은 대학의 시간강사들 사이에서 성적 정정은 금기사항이다. 강사 계약 연장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어서다. 그러나 지난 학기에 선생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성적을 정정해주었다.
보통 학생들의 경우 성적 이의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다시 요청하지 않는다. 그런데 기말고사를 보지 않아서 F를 준 학생이 재차 이메일과 카톡까지 보내면서 성적을 정정해줄 것을 간청하는 것이다. 학생은 집안이 갑자기 어려워지는 바람에 일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며 그 증거로 도로를 도색하는 사진을 잔뜩 보내왔다. 그리고 대기업 하청 업체에 취직이 되었다는 것이다. 맘이 약해진 나는 학사팀에 학생의 다른 과목 성적을 문의했는데, 나만 F를 준 것이다. 고뇌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시험 미응시자에게 점수를 부여한다는 것은 나의 원칙을 완전히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학생의 점수는 그대로 놔두고 등급을 수정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재수강 여부가 학생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에 내린 결론이었다.
학령인구의 감소로 대학의 위기가 가시화되면서 지방에서는 수능시험이 무용지물이 되고 있다. 그러한 영향 때문인지 공부에 전혀 관심이 없는 학생들을 나의 강의실에서도 만나게 되는데, 강의하는 내내 앉아있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학생들의 시험 결과는 예상을 전혀 벗어나지 않는다. 문제는 그런 학생들이 늘어난다는 것에 있다. 어쩌면 내가 채점을 미루는 이유는 뻔한 결과를 확인하고 싶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