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흔한 흰색의 즉석밥 용기가 있다. 1개의 무게는 9g. 111개를 모아야 1㎏이다. 복합재질(other) 플라스틱이라서 재활용이 어렵고 대부분 소각이나 매립된다. 그런데 이 용기를 생산하는 업체는 재활용책임비용으로 고작 354원만 내면 그만이다.
1㎏의 페트병도 모아봤다. 26개의 병이 쌓였다. 생수, 탄산음료, 주스 등. 쓰임새는 제각각이지만 모두 한 번 쓰고 버리게 될 일회용 플라스틱 쓰레기다. 이 모든 페트병을 재활용하기 위해 제조사가 부담하는 비용은 100원짜리 동전과 50원짜리 동전을 합친 것보다도 적다. 생산자책임재활용(EPR) 제도상 올해 책정된 페트병의 분담금 단가가 ㎏당 148원에 그치기 때문이다.
호주의 비영리재단인 민덜루(Minderoo)재단의 발표에 따르면 2019년 기준 한국의 1인당 일회용 플라스틱 사용량은 세계 3번째(44㎏)이다. 1위는 호주(59㎏), 2위는 미국(53㎏)이었다.
소비자들은 플라스틱 포장 제품을 살 때마다 죄의식이 드는데 기업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과대포장 경쟁을 이어가는 이유는 한국에선 그래도 불이익이 별로 없어서다.
한국일보 기후대응팀은 매출액이 높은 순으로 총 70개 기업(식음료 기업 50곳, 화장품 기업 10곳, 유통기업 10곳)이 플라스틱 등 일회용품을 만드는 대가로 납부하는 재활용책임비용(재활용분담금)을 분석했다. 현행 체계에서 기업은 분담금만 내면 재활용 책임을 다한 것으로 간주된다. 폐기물이 실제로 재활용됐는지 여부와는 상관없다.
한국일보 분석 결과, 기업별로 재활용폐기물 생산량 ㎏당 평균 152원만을 내는 것으로 집계됐다. 생산량의 약 75%인 재활용의무량(전체 배출 재활용폐기물 중 분담금이 부과되는 비율)으로 따져도 ㎏당 204원이다.
이 책임비용은 유럽국가들의 절반에도 못 미치며, 기업 매출액의 약 0.1%에 불과하다. 연매출 수조원에 이르는 대기업에는 미미한 부담이어서 2, 3겹의 포장을 줄이지 않는다. 좁은 국토에서 쓰레기를 처리할 곳이 부족하고, 플라스틱의 원료는 석유이며 제조과정 등에서 탄소가 배출되는데도 말이다.
한국일보는 EPR 분담금 문제를 취재하며 분담금이 실제 재활용 처리에 필요한 비용보다 턱없이 낮게 책정되고, 이로 인해 기업들이 쏟아낸 플라스틱 폐기물 등의 막대한 처리비용을 세금으로 메우고 있는 현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EPR 분담금 문제를 4회에 걸쳐 분석한다.
한국일보는 박대수 국민의힘 의원실에 의뢰해 환경부로부터 2020년 70개 기업이 납부한 재활용분담금 내역을 입수했다. 우선 식음료 기업 50곳을 집중적으로 살펴봤다. 지난해 그린피스의 가정집 플라스틱 폐기물 조사에 따르면 전체의 78.1%가 식품포장재였다.
CJ제일제당은 식음료 기업 중 2020년 매출액이 5조9,808억 원에 이르러 1위였다. 2020년 플라스틱 등 일회용 포장재를 5만9,665톤 생산했다. 이 기업 제품인 비비고의 '시원바지락칼국수'를 보자. 2인분을 1인분씩 낱개 포장했다. 겉봉지를 열면 두 개의 봉지가 나오는데, 이 안에는 면과 고명을 담은 플라스틱 트레이와 소스봉지가 들어가 있다. 하나의 제품에 플라스틱 포장재가 7개이다.
CJ제일제당은 6만 톤에 가까운 포장재의 재활용분담금으로 고작 73억 원만 냈다. 매출액의 단 0.1%, 폐기물 ㎏당 약 124원이다. CJ제일제당은 즉석밥으로 유명한 햇반, 각종 즉석식품을 판매하는 비비고부터 쁘티첼 등 간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식품을 판매한다.
청정원·종가집 등의 식품 브랜드를 보유해 매출액(2조6049억 원) 2위를 차지한 대상은 2020년 3만213톤의 포장재를 생산했다. 재활용분담금은 29억 원으로 역시 매출의 0.1%였다. ㎏당 97원에 그친 셈이다.
오뚜기는 2020년 3만2,641톤의 포장재를 생산했다. 분담금은 38억 원, 매출액(2조3052억 원)의 0.2%다. 농심은 2만9,510톤의 포장재를 생산했고 분담금을 58억 원 냈다. 매출액(2조1057억 원)의 0.3%이다. 오뚜기, 농심의 포장재 ㎏당 분담금은 각각 118원, 196원이다.
2020년 매출이 식품업계 4위였던 롯데칠성음료는 무려 9만2,548톤의 포장재를 생산했다. 롯데칠성음료가 낸 분담금은 81억 원으로 매출액(2조1,619억 원)의 0.4%였다. ㎏당 88원이다.
생산량에 비해 분담금이 다소 적은 이유는 롯데칠성음료가 주로 생수와 페트병 음료를 판매하기 때문이다. 2020년 당시 페트병의 ㎏당 분담금 단가는 무색(투명) 141원, 유색 235원이었다. 햇반 등 식품용기에 자주 쓰이지만 재활용이 어려운 복합재질 용기류(339원)나 복합페트(358원)에 비해 낮았다.
한국의 화장품 용기는 불필요하게 두껍기로 유명하다. 플라스틱 두께가 무려 3㎝에 이르기도 한다. 더구나 물질재활용이 어렵기로 악명 높다. 복합재질 플라스틱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화장품업체들이 내는 재활용분담금은 매출액의 평균 약 0.08%에 불과하다.
화장품기업 중 2020년 매출액이 4조5,099억 원으로 가장 많았던 아모레퍼시픽은 그해 1만1,927톤의 포장재를 사용했다. 업체가 낸 분담금은 18억 원뿐이었다. 매출의 0.04%, ㎏당 200원에 그친다.
엘지생활건강은 2만4,303톤의 포장재를 생산했고 33억 원의 분담금을 냈다. 이는 2020년 매출액(4조5,020억 원)의 0.07%다.
두 회사의 과대포장은 여전하다. 매장에서 살펴본 아모레퍼시픽의 '려 탈모케어 모근두피에센스'와 엘지생활건강의 '엘라스틴 탈모 트리트먼트'는 플라스틱 본품에 블리스터 포장을 덧씌웠다. 블리스터 포장이란 얇은 시트 두개를 붙여 접착시키는 포장 기법이다. 이런 겉포장은 제품 개봉 후 바로 버려질 운명이다. 불필요한 일회용 플라스틱을 사용한 것이다.
화장품기업 중 매출액 4위인 코스맥스와 5위 한국콜마는 EPR 분담금을 내지 않았다. 이는 두 회사가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기업이기 때문이다. 두 회사가 제조한 제품의 포장재 분담금은 판매 브랜드 기업인 아모레퍼시픽, 엘지생활건강 등이 냈다. 동일한 포장재에 중복 부과를 피하는 원칙에 따른 것이다. 매출액 각각 8, 9위인 카버코리아와 지피클럽도 같은 이유로 분담금을 내지 않았다.
이마트·홈플러스·코스트코 등 유통업체들이 낸 분담금은 매출액의 0.01%에 불과하다. 자체브랜드(PB) 상품에만 생산자 재활용 의무가 부과되기 때문이다. EPR 제도는 제품의 제조·판매·수입업자 중 하나에만 책임을 묻는다. 마트·백화점 등 유통업체는 제품의 배송·판매 과정에서 포장을 추가해 막대한 쓰레기를 생산해내는 경우가 많지만, 분담금 의무가 없다.
자체 제작 상품의 포장재 생산량도 상당하다. 이마트의 PB브랜드 피코크에서 나온 '오리지날 따봉' 소시지 제품은 66개의 낱개상품을 묶어 판매하는 제품이다. 소시지 특성상 매번 먹을 때마다 비닐 쓰레기가 발생하는데 모두 물질재활용이 어려운 복합재질이다.
이마트는 유통업체 중 2020년 매출이 가장 높았다. 그해 2만1,929톤의 포장재를 생산했다. 이마트가 낸 분담금은 32억 원, 매출액(16조285억 원)의 0.02%에 그친다. 매출액 2위인 GS리테일(8조5,690억 원)은 3,273톤의 포장재를 생산했고 4억6,200만 원의 분담금을 냈다. 매출의 0.01%다.
물론 기업들은 정부가 정한 대로 분담금을 납부하고 있다. 환경부가 정한 단가 자체가 워낙 낮다. 2022년 폐기물 1㎏당 EPR 분담금 단가는 투명 페트병 148원, 단일재질 플라스틱 용기 104원, 복합재질 플라스틱 및 비닐 등이 354원이다.
제대로 재활용도 하지 못하는 복합재질 플라스틱 1㎏을 수거·선별 후 처리하는 데 드는 비용 중 생산 기업은 500원도 책임지지 않는 것이다.
주요 국가들과 비교해보면 심각성을 알 수 있다. 프랑스의 경우 2021년 기준 투명 페트병에 ㎏당 약 443원(0.33유로)의 비용을 부과했다. 복합재질 플라스틱에 대한 분담금은 약 636원(0.47유로)이다. 가정용 포장재의 수거·분류·처리에 드는 비용의 약 73%를 기업 분담금으로 조달하는 게 프랑스 제도의 원칙이다.
2022년 기준 네덜란드는 플라스틱 포장 폐기물 전반에 ㎏당 약 940원(0.7유로)의 분담금을 책정했으며, 벨기에는 재활용이 어려운 복합재질 플라스틱 사용에 약 1,945원(1.448유로)의 분담금을 부과하고 있다. 국내 분담금의 최소 2배에서 최대 6배에 달한다.
물론 해외 각국의 재활용 시장과 우리나라의 상황을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EPR 분담금이 현실과 동떨어져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김미화 자원순환사회연대 이사장은 “제도가 도입되던 2003년에는 비닐 한 장이라도 아쉬워했을 정도로 재활용이 잘되던 시기였고 앞으로도 늘 그럴 거라는 가정하에 기준을 정했다”라며 “지금처럼 폐기물이 많아지고 재활용 원료의 시장성이 낮은 상황과는 동떨어진 기준”이라고 말했다.
현행 체계는 기업의 자발적 감축을 이끌어내는 데도 역부족이다. EPR의 목적 중 하나는 생산자가 생산 단계에서부터 재활용이 용이한 재질을 사용하고 플라스틱 양을 줄이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EPR 포장재 출고·수입량은 제도시행 첫해인 2003년 99만 톤에서 2010년 122만 톤, 2020년 158만 톤으로 크게 증가했다.
백나윤 환경운동연합 활동가는 “현행 EPR 제도는 기업이 분담금을 내고 실적을 채우는 식”이라며 “이 경우 실제 책임을 지기보다는 ‘돈만 내면 끝’이라는 인식만 남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돈조차 미미해서, 기업들에는 과대포장 줄이기를 위한 행동에 나설 유인이 되지 못하는 현실이다.
◆플라스틱의 나라, 고장 난 EPR
<1>플라스틱 쏟아내도 푼돈만 부과
<2>벌칙금조차 너무 적다
<3>부족한 비용은 세금으로
<4>누더기 산정 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