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침공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우크라이나 남동부 마리우폴 주민 300여 명이 최근 러시아 극동 프리모르스키주(연해주)로 이주한 것으로 나타났다. 러시아 정부는 이들이 스스로 자국 땅을 밟았다고 주장하지만, 우크라이나는 ‘강제 추방’이라고 보고 있다. 일제강점기 원치 않게 연해주에 갔다가 이후 독재자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내몰렸던 고려인들의 수난 역사가 우크라이나에서 재현되고 있다는 얘기다.
25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국영통신 우크린포름과 미 CNN방송 등에 따르면, 러시아는 마리우폴 주민 308명을 8,000㎞나 떨어진 연해주로 이동시켰다. 이 가운데 90명은 어린이고, 성인 상당수는 여성이다. 이들은 21일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나홋카 역에 도착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지역 언론 VL.ru는 이날 마리우폴에서 온 피란민들이 기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담긴 사진과 영상을 공개했다. 일부는 미소를 짓기도 했지만, 울음을 터뜨린 사람들도 보였다고 현지 매체는 전했다.
고향을 등진 주민들이 러시아 극동 지역에 도착하기까지 여정은 험난했다. 남편과 함께 나홋카 역에 도착한 마리우폴 수도사업소 전 직원 미로슬라바는 “우리는 마리우폴에서 30㎞ 떨어진 마을에서 며칠 머물다 도네츠크주에 있는 베즈멘노에로 이동해 11일 동안 있었다”며 “이후 ‘여과 캠프’를 통과한 뒤 러시아 남서부 도시 타간로크와 모스크바를 거쳐 이곳으로 왔다”고 말했다. 여과캠프는 러시아가 설치한 난민 텐트촌이다. 우크라이나 당국은 러시아가 피란민을 본토로 강제 이주시키기 전 생체 인식 검사와 사상 검증을 하는 곳으로 보고 있다.
연해주로 이송된 마리우폴 시민들은 일단 인근 브란겔의 임시 거처에 머물고 있다. 연해주에는 우크라이나 피란민을 위한 14개의 임시 거처가 마련됐다고 CNN은 전했다. 이는 루한스크인민공화국(LPR)과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 다른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오는 이주민 1,3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 연해주 당국은 이주한 어린이들은 모두 유치원ㆍ학교 교육을 받으며, 가족이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더라도 정상적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마리우폴시 공식 텔레그램 계정에도 “연해주로 간 주민들은 학교와 기숙사에 수용됐다”며 “추후 연해주 지역 다른 정착촌으로 이주할 계획”이라는 글이 올라왔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연해주 이주를 자발적 선택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 친러 성향의 주민들이 적지 않았던 만큼 이들이 스스로 이주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익숙한 삶의 터전을 버리고 무려 8,000㎞ 떨어진 생면부지의 땅을 선택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로 인해 ‘남아서 죽느냐, 러시아로 가느냐’ 두 가지 선택지 앞에 놓인 우크라이나인들이 생존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을 했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는 분석이다. 우크라이나가 이를 ‘강제 이송’이라고 주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류드밀라 데니소바 우크라이나 인권 행정감찰관은 텔레그램에 “러시아는 전시 민간인 보호를 위해 체결된 제네바 협약 제49조를 심각하게 위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추방ㆍ이송ㆍ철거 등 점령지에 대한 규정을 밝혀놓은 이 조약의 마지막 조항은 “점령국은 민간인 주민 일부를 점령지역으로 추방하거나, 또는 이동시켜서는 안 된다”고 규정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