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춘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하는 시계수리의 명가

입력
2022.04.30 05:30
14면
<82> 대구 교동시장 공인사
박준덕 영국시계협회 명장의 혼이 깃든 가게


시계 애호가의 애지중지 명품시계가 고장 난다면. 보증기간이 지나 유상으로라도 고치고 싶은데 시계가 너무 오래돼 부품이 없어 ‘수리 불가’ 통보를 받는다면 어떨까? 고가에 구입한 시계를 못 쓰게 된 것이 일단 아쉬울 것이고, 그 시계에 깃든 나의 옛 기억과 인생마저 함께 사라진 것 같아 속상한 마음이 클 것이다.


스위스 본사도 포기한 시계도 ‘뚝딱’ 대구 공인사

멈춘 시간을 마법같이 다시 살려내는 곳, 스위스 명품 메이커도 수리를 포기한 시계를 뚝딱 고쳐내는 곳이 바로 대구에 있다. 구할 수 없는 부품은 직접 만들어 고친다. 스위스에서, 일본서도 수리를 포기한 시계를 고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대구 중구 교동길에 자리 잡은 공인사 얘기다.

대구역 남쪽 태평로를 건너 대구의 중심 동성로를 따라 걷다 동쪽 골목길로 들어서면 교동시장이 나온다. “없는 게 없다”는 시장이다. 교동은 예전에 지방공립교육기관인 대구향교가 있던 곳이어서 붙은 이름이다. 대구향교는 일제강점기에 중구 남산동으로 이전했기에, 교동이란 이름은 시장에만 남아 있는 셈이다.

교동시장은 한국전쟁 때 몰려온 피란민들이 미제군복, 공구, 가전제품, 수입과자, 커피, 분유, 옷가지 등 생필품을 팔며 성장한 곳이다. 수입자유화 이전인 1980년대까지 가전제품이나 수입의류, 커피, 과자 등으로 유명했다.

시장 형성기부터 이곳에는 내로라하는 시계수리점이 잇따라 생겨났다. 공인사도 그중 하나다. 잠자는 시계를 깨우는 영국시계명장 박준덕(73) 장인의 60년 시계인생이 녹아 있는 노포 중의 노포다. 명품 기계식 시계만 전문적으로 수리하는 곳이다.


국내 2번째 영국시계명장 박준덕 장인

23일 찾은 공인사는 '구멍가게'라는 이름이 딱 어울리게 작은 곳이었다. 박 장인은 "혼자 하는 일이기 때문에 넓은 공간이 필요 없다”고 말했다. 시계수리용 공구, 의뢰받은 시계와 부품을 보관할 캐비닛, 의뢰인이 잠시 앉아 기다릴 의자 몇 개만 놓으면 자리는 충분하다.

가게 내부는 여느 수리점과 비슷했다. 정밀 부품을 잘 볼 수 있게 해주는 조명등, 눈에 부착하는 돋보기 등이 눈에 들어왔다. 단종된 부품을 직접 제작하기 위한 장비가 이채로웠다.

진열대 위와 사방 벽면을 가득 채운 자격증과 감사패, 상패 등이 눈에 들어왔다. 그 중 한 장애인재활기관에서 준 감사패에 유독 시선이 갔다. 박 장인의 기술지도로 1995년 호주 퍼스에서 열린 제4회 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대회 시계수리 분야에서 금메달을 땄다. 그는 재활기관에 특수 장비를 후원한 공로로 감사패를 받기도 했단다.

그는 "당시 부산의 한 지체장애인이 기능올림픽 금메달을 따고 싶다며 찾아와 1년간 기술을 전수했다"며 일화를 소개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매일 부산서 대구까지 출퇴근을 했어요. 그 사람이 진정 의지의 한국인이죠. 60년 시계수리 인생에서 가장 보람된 일 중 하나입니다.”

박 장인은 영국시계협회(BHI·The British Horologic Institute)가 주관하는 테스트를 한국에서 두 번째로 통과한 명장이다. BHI 최고 등급이라고 할 수 있는 FBHI 회원이기도 하다. FBHI 회원은 최고기술등급 시험에 통과해 지속적으로 시계수리업에 종사하는 프로에게 주어지는 멤버십이다.

FBHI 회원이 되기 전에 박 장인은 BHI가 운영하는 통신교육과정을 6년 만에 마치고 1984년 마지막 시험에 응시했다. 36과목을 이수한 뒤 시계학이론, 시계학제도, 실기테스트 3과목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했다. 영국시계명장의 반열에 오른 순간이었다. 3과목 40점 이상이면 합격, 60점 이상이면 영예 합격, 80점 이상은 신의 경지라고 한다. 그는 ‘영예 합격’을 했다. 실기테스트만 보면 80점으로 ‘신의 경지’에 올랐다고 한다. 그해 전세계에서 300명이 응시해 단 8명만 통과했단다. 동양인으로선 혼자였고, 실기에서 80점 이상을 받은 응시자도 그밖에 없었다.

BHI에 도전하기 전부터 그는 이미 시계수리의 달인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자격증에 목말라, 일본 스위스 등 시계 선진국에 알아보다 영국시계협회에서 자격증을 준다는 정보를 얻고 도전하게 됐다.


초등학교 때 라이터 고쳐주고 용돈 번 남다른 손재주…

그가 시계와 인연을 맺은 것은 초등학교 졸업 직후인 10대 초반부터다. 그는 “가난한 집안의 3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나, 진학은커녕 당장 입에 풀칠을 걱정해야 했다”며 “배곯지 않을 일이 무엇일까 고민 끝에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시계수리를 배우려고 동네 시계수리점을 찾았다”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남달랐다고 한다. 초등 4학년 때는 수리점에서 포기한 지포나 던힐 라이터를 고쳐주고 받은 돈으로 용돈벌이를 할 정도였다.

교동 일대 시계 수리전문점 몇 군데서 기술을 배운 그는 3년 뒤에는 지역 최고로 알려진 시계수리점인 성우당에 기술자로 입사했다. 1960년대 중반의 일이다. 그 곳은 ‘다른 데서 못 고치는 시계만 고친다’는 수리점이었다. 박 장인은 “사장님이 일본에서 시계대학을 졸업한 분인데, 기술이 대단했다"며 "거기서 5년간 일하면서 시계부품 제작기술 등을 배웠다”고 말했다.

시계수리에 자신감이 생긴 그는 1970년대 초반 독립했다. 시계수리점 한쪽에 서너 명이 조를 이뤄 수리하는, 요즘으로 말하면 ‘소사장’ 같은 개념이었다. 공인사의 역사는 이때부터 시작된 셈이다. 그는 지난해 여름 가게를 옮겼다. 1987년부터 점포를 유지했지만, 바뀐 건물주가 임대료를 몇 배나 올려받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200년 된 독립운동가 회중시계도 복원

공인사는 독립투사의 유품인 200년 가까이 된 회중시계를 복원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2014년 말, 한 의뢰인이 독립투사인 외조부의 유품이라며 다 삭은 회중시계 하나를 들고 박 장인을 찾아왔다고 한다. 외조부 유해와 함께 만주에 묻혔던 것인데, 모국으로 이장하던 과정에 발견했다고 한다.

이 시계는 세계 최고급 럭셔리 시계브랜드로 통하는 파텍필립사의 창업자 파텍이 동업자 필립과 합치기 전 제작한 시계였다. 제작연도가 1840년대로, 남은 부품이 있을 리 없었다. 의뢰인은 스위스 본사와 일본에 수리를 요청했으나 퇴짜를 맞고 박 장인을 찾아왔다.

이 시계 수리에 꼬박 1년이 걸렸다고 한다. 없는 부품을 새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시계 수리가 아니라 차라리 유물 복원에 가까웠다. 그는 “15개 가량의 핵심 부품을 새로 제작했다”며 “독립투사의 유품이 아니었다면 맡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 같은 그의 시계 인생은 서울교과서에서 발행한 '화법과 작문' 진로탐색 단원에 사례로 실리기도 했다. 정규교육은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피나는 노력으로 자신이 선택한 분야의 최고가 된 대표적 사례로 그의 인생이 꼽힌 것이다.

그는 요즘 하루 한두 개를 수리한다고 했다. 밥벌이가 될까? 그는 “우리 가게에 오는 시계는 대부분 다른 데서 포기한 것들”이라며 “많이 고치고 싶어도 고칠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공인사는 1인 점포라 누군가 물려받지 않으면 그 역사는 중단된다. 박준덕 장인의 실력과 명성, 열정을 이을 사람을 찾지 못한다면 10년 뒤를 장담하기 어려운 것이다. 장인의 손길로 멈춘 시간을 깨우는 시간 지킴이. 공인사의 시간은 멈춤 없이 계속 흐를 수 있을까?


정광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