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만큼 깊고 푸른 계곡... 맑은 물 베고 누운 정자 하나

입력
2022.04.27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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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영덕 달산면 옥계계곡과 침수정

경상 동해안 지역의 빼어난 경관을 이르는 표현으로 ‘남반구북옥계(南盤龜北玉溪)’라는 말이 있다. 울주군 반구정 일원이 남부를 대표하는 경승이라면 북부의 대표주자는 영덕군 옥계계곡이다. ‘블루로드’ ‘블루시티’ 등 영덕에선 어딜 가나 ‘블루(Blue)’라는 표현이 넘친다. 동해라는 천혜의 자원을 활용한 관광 브랜드다. 영덕의 산과 계곡도 동해 바다 못지않게 깊고 푸르다. 청송 주왕산과 포항 내연산 사이 달산면 옥계계곡으로 간다.


주변 풍광 끌어와 맑은 물 베고 누운 침수정

옥계계곡이 위치한 달산면은 영덕에서도 외진 곳이다. 안동으로 연결되는 34번 국도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면소재지가 나온다. 겨우 50가구 남짓한 조그만 동네인데, 이곳을 벗어나면 더욱 한적해져 10채 안팎의 작은 마을이 드문드문 나타날 뿐이다.

양쪽으로 산줄기에 갇혀 있지만 들판은 제법 넓고 아늑하다. 지금 이 산골엔 사과꽃이 한창이다. 키 작은 사과나무가 도로 양편으로 과수원을 형성하고 있다. 사과꽃은 꽃받침 부분이 엷은 분홍색을 띠지만 대체적으로 흰색이다. 메밀꽃이 소금이라면 사과꽃은 눈송이다. 햇살에 하늘거리는 꽃잎이 함박눈을 뒤집어쓴 듯 눈이 부시다.


옥계계곡 부근에 이르면 좁은 들판마저 자취를 감춘다. 산은 높고 계곡은 깊어진다. 청송 주왕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가천에 포항 내연산에서 발원한 대서천이 합류해 세 가닥으로 물줄기가 펼쳐지는데, 암반 위에 침수정(枕漱亭)이라는 작은 정자가 하나 올라앉아 있다. ‘수(漱)’ 자가 다소 까다롭다. ‘양치질하다’ ‘씻다’라는 뜻이다. 중국 고사인 ‘침류수석’에서 유래한 말로 ‘물을 베개 삼고, 돌로 이를 닦는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말하자면 침수정은 맑은 물을 베고 누운 정자다. 국내의 누각과 정자 가운데서도 경치가 빼어나 지난 2월 일대가 국가명승으로 지정됐다.

침수정은 손성을이 조선 정조 8년(1784)에 지었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문과는커녕 생원시나 진사시에도 이름이 없지만, 글이 모자라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증거는 계곡 곳곳에 남아 있다. 정자 주변 바위와 물줄기, 그로 형성된 크고 작은 폭포와 소, 일대의 봉우리와 산줄기까지 살펴 ‘옥계 37경’이라 이름하고 뛰어난 글재주로 각각의 의미를 부여했다. 현미경으로 보는 것처럼 미시적으로 관찰하고, 공중에서 보는 것처럼 거시적으로 두루 살펴야 가능한 일이다.





보통 사람처럼 과거시험을 통해 출세를 지향한 인물은 아닌 듯하다. 8경이나 9경도 쉽지 않은 터에 37경을 노래했으니, 일찍부터 산수에 묻혀 대자연의 정취를 즐기고 거기에서 깨우침을 익힌 자연 철학자에 가깝다. “만사에서 벗어나 이 몸을 정자 하나에 맡겨두니, 맑은 물소리 부서져 난간으로 들어오네.” 침수정 환경을 묘사한 문장에 주위의 자연을 집안으로 끌어들인다는 전통적인 정원 구상, 즉 차경(借境)의 미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조그만 정자 하나가 세상에서 가장 크고 훌륭한 풍경을 품은 셈이다.

그의 37경을 하나하나 살피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일반인의 눈에도 범상치 않은 경관은 쉽게 확인된다. 우선 침수정 바로 아래 깎이고 갈라진 바위 지형만도 잘 꾸며진 자연의 정원이다. 맨질맨질한 암반과 날카로운 암봉, 그 사이를 굽이치는 물굽이에 손성을은 조연·부연·탁영담·삼귀담·구정담·세심대 등의 이름을 붙였다. 정자 뒤편의 바위산은 병풍대, 그 옆에 뾰족하게 솟은 봉우리는 촛대암이다. 계곡 한가운데에 덜렁 굴러떨어진 것 같은 진주암과 모자이크 모양의 층층 절벽 학소대도 있다.

정자 맞은편 산허리의 삼층대, 그 아래 구멍이 숭숭 뚫린 바위는 천조(天竃)라 이름했다. ‘우주만물을 먹여 살리는 하늘만 한 큰 솥’이라는 의미다. 계곡 뒤편 일대에서 가장 높은 팔각봉(633m)은 제2경이다. 8개의 험준한 바위봉우리로 연결된 산으로, 등산로는 4.5㎞에 불과하지만 2시간 이상 걸린다.


“신선의 도를 배우려 계단을 만들어서, 뚜렷이 삼층을 나누어 냇가에 우뚝 서있네. 머리 위의 기이한 모습 누구나 알 수 있고, 몇 년 동안 애쓴다면 한 번쯤 오를 텐데.” 제6경 삼층대를 노래한 시를 보면 주변 지형이 험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도로도 없던 시절에는 큰 맘 먹어야 한번 다녀올 수 있는 오지였을 테지만, 옥계계곡을 찾는 문인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영덕문화원에서 펴낸 ‘옥계 37경을 찾아서’는 기록으로 남아 있는 12편의 옛 기행문을 싣고 있다.

조선 후기의 학자 김종덕은 옥계유산록(玉溪遊山錄)에서 “골짜기가 밝고 물이 맑아 마치 밝은 횃불을 들고 지나가는 듯하였다. 돌은 모두가 서 있는 얼음 같았고, 물은 모두가 거울을 펼친 것 같았다. 바위틈은 모두 폭포이고 웅덩이는 모두 맑은 연못이었다”라고 감탄했다.

청송 사람 권렴은 옥계유록(玉溪遊錄)에서 구석지고 험준한 산속에 있기 때문에 장사꾼과 유람객, 나무꾼들만 왕래하는 곳이라 했다. 또 좋다는 소문을 들어도 가기 힘들고 설사 가서 보고 즐기더라도 거처(잠자리)가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아침저녁으로 안개와 구름이 덮이는 자태와 봄과 가을에 꽃이 피고 낙엽이 지는 전경”을 칭송했지만, “맡아 다스릴 만한 사람이 없어 적막하다”고 지적했다. 손성을도 분명 이 글을 읽었던 모양이다. 그는 침수정을 지은 뒤 병풍대 바위 절벽에 ‘산수주인 손성을(山水主人 孫聖乙)’이라는 글자를 또렷하게 새겼다.




옛 사람들의 무수한 찬사에도 불구하고 담장으로 둘러진 침수정 대문은 평시에 굳게 잠겨 있다. 관리가 쉽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명승으로 지정됐지만 여행 환경도 아직은 미비하다. 정자에도 들어갈 수 없고 산책로도 없으니, 옥수를 담은 바위 절경을 제대로 감상하는 것이 쉽지 않다. 계곡 주변에도 그 흔한 탐방로나 안내판이 없어 37경을 세세하게 즐기기 어렵다.

그럼에도 피서객으로 붐비는 여름 한철만 빼면 차량 통행이 뜸해 여유롭게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다. 침수정 부근에 무료 주차장을 설치해 놓았고 주변 계곡에 내려가서 쉬어갈 수 있다. 영덕에서 시내버스가 1시간 30분마다 운행해 깊은 산골임에도 대중교통 여행이 어렵지 않다는 것도 장점이다.

얼음골과 황장재까지 환상 드라이브

옥계계곡 드라이브 길에 함께 즐길 만한 곳으로 산성계곡 생태공원과 청송 얼음골이 있다. 침수정에서 각각 하류로 2.5㎞, 상류로 5.5㎞ 떨어져 있다.

산성계곡 생태공원은 이름과 달리 숲속 놀이터다. 입구에서 목재 데크 산책로를 따라 조금만 이동하면 아담한 솔숲이 나온다. 아름드리 소나무를 연결해 V자와 U자형 그물타기(네트로드)와 동그란 목판 징검다리(원형플랫폼) 등을 설치해 놓았다. 자연스럽게 숲과 친해질 수 있는 놀이시설이어서 아이를 동반한 가족뿐만 아니라 연인들에게도 인기를 끄는 곳이다. 입장료는 성인 4,000원이다.




산성계곡은 팔각산 뒤편으로 이어지는 산 능선에 성터가 남아 있어서 붙인 이름이다. 아직까지 명확히 실체가 규명되지 않은 옛 산성이다. 생태공원에서 계곡 초입의 초화원(꽃밭)까지는 출렁다리로 연결된다. 흔들림이 거의 없는 이름만 출렁다리지만 내려다보는 계곡 풍광이 아찔하다.

청송 얼음골은 한여름 피서지다. 기온이 섭씨 35도를 넘어서면 응회암 너덜지대에 얼음이 형성되고 숭숭 뚫린 구멍(풍혈)으로 차가운 바람이 새어 나온다. 아래의 차고 습한 공기가 바깥으로 나오면서 따뜻하고 건조한 공기와 만나는데, 이때 공기 중의 습기가 기화하면서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한다. 얼음골은 이곳 청송을 비롯해 밀양 의성 등 전국 20여 곳에 분포한다. 아직은 냉기를 접하기 이르고 대신 산정에서 62m 수직 하강하는 인공폭포가 초여름 더위를 식혀준다.




호젓하게 드라이브를 더 즐기려면 영덕에서 안동까지 고속도로 대신 34번 국도를 이용할 것을 권한다. 구불구불한 이 길은 당진영덕고속도로가 개통한 후 이용하는 차량이 눈에 띄게 줄었다. 영덕과 청송의 경계지점에 황장재가 있다. 질 좋은 소나무인 황장목을 보호하기 위해 함부로 벌채하지 못하도록 일대를 황장봉산(黃腸封山)으로 지정한 것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동해에서 잡은 고등어를 왕소금으로 염장해 내륙으로 운반하던 길목이기도 하다. 그렇게 탄생한 음식이 안동간고등어다. 고갯마루에 조성한 작은 공원에 잠시 멈춰 옛길의 정취를 더듬어 보는 것도 좋겠다.

영덕=글·사진 최흥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