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게 공부 좀 더 하지. 너 하나 때문에 몇 명이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거냐."
고위공직자 자녀들의 '부모찬스' 의혹이 불거질 때마다 기자실에 심심찮게 들리는 소리입니다. 공직자 자녀가 명문대‧좋은 직장에 들어갔을 때, 하필이면 그 부모와 이해상충 여지가 다분하고 아슬아슬하게 턱걸이로 붙었다면 수십 개 언론 매체가 합격의 인과 관계를 따져봐야 하니까요. 월등한 성적으로 붙었다면 애초에 의혹이 나오지도 않았을 테니 저런 푸념이 나오는 겁니다. 의혹이 사실이라면 비리가 가능하게 손을 쓴 사람들도 '고생'을 하고 있겠죠.
윤석열 정부 초대 내각 인선을 두고 부모찬스 논란이 또 불거졌습니다. 장관 후보 자녀들이 부모 덕에 ①남들보다 쉽게 좋은 학교‧좋은 직장에 들어가거나 ②취직도 하기 전에 거액의 재산을 받거나 ③남자는 군 입대가 면제됐거나 가더라도 꽃보직을 얻었다는 주장이죠. 사실 이런 논란은 수십 년째 거의 똑같은 레퍼토리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자녀의 입시부정이나, 국정농단의 시발점이 된 최서원씨 딸 정유라의 입시비리가 처음이 아니라는 말이죠. 다만 여론전에 떠밀린 후 자녀들이 받은 '처분'은 그때그때 달랐습니다. 지금까지 불거진 굵직한 '부모찬스' 논란을 정리해봤습니다.
부모찬스 논란이 대대적으로 시작된 건 ①1993년 김영삼(YS) 정부 때입니다. 초대 내각 인사로 발표된 박희태 법무부 장관, 최창윤 총무처 장관의 딸들이 '정원 외' 선발 규정인 외국인특별전형으로 명문대에 합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논란이 불거졌죠. 이중국적자인 두 장관의 딸들은 외국인 신분으로 각각 이화여대 동양학과, 이화여대 서양학과에 입학했는데, 여론이 나빠지면서 모두 사퇴하는 걸로 마무리됐습니다. 아직 졸업까지 2년이 남았던 박 장관의 딸은 이화여대를 자퇴했죠.
②김대중(DJ) 정부에서 국회 청문회제도가 처음 생긴 후, 국무총리 지명자를 줄줄이 낙마시킨 것도 자식 문제였습니다. 대표적 인사가 장대환 국무총리 후보로 대출 의혹과 자녀 위장전입이 발목을 잡아 국회 임명동의를 받는 데 실패했죠. 그의 아들, 딸이 초등학교 입학하기 직전인 1987년 12월, 1988년 12월에 집 주소를 신문사 임원이 사는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로 옮겼다가 자녀들이 압구정 초등학교에 입학한 88년 4월, 89년 4월에 다시 이전 주소지인 성북구 안암동 자택으로 옮긴 게 들켰거든요. 장 후보는 불법대출, 부동산 투기 의혹을 끝내 부인했지만, 위장전입에 대해서는 "맹모삼천지교 차원에서 봐달라"고 사과했습니다. 한데 이 사과를 듣고 서초‧강남 지역 학부모들이 들고 일어나 장 사장 자진사퇴를 촉구했습니다. "명백한 사회병리현상을 맹모의 올곧은 사랑으로 미화시키는 사람이 어떻게 총리직을 수행할 수 있냐"는 거죠.
역대 정부마다 자녀 교육 문제로 고위직에서 낙마한 사례가 꼭 하나씩 있더군요. ③참여정부 때인 2005년에는 장관들이 잇달아 자식문제로 중도 사임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포문을 연 건 이기준 교육부총리. 서울대 총장시절부터 사외이사 겸직, 장남 병역기피 의혹, 판공비 과다지출 문제가 불거졌는데 청와대가 이 사실을 알면서도 임명을 강행해 더 비판을 받았죠. 게다가 장남이 연세대 화학공학과에 '검은 머리 외국인'으로 입학한 사실이 알려져 비난이 일파만파 퍼졌습니다. '국적만 외국인'이면 해외 거주 경험 없이도 지원 가능한 외국인 특별전형이 이 부총리 아들이 연세대에 입학하기 1년 전인 1985년에 생겨 부모찬스 의혹을 더 키웠죠. 결국 이 부총리는 취임 57시간 만에 사퇴합니다. ④이명박(MB) 정부에서도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가 자녀 진학을 위해 다섯 차례 위장전입한 사실이 알려져 낙마했죠.
⑤박근혜 정부에서는 정성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의 자녀 미국유학이 도마에 올랐습니다. 2001년 특파원이 아니었는데도 언론인 취재(I) 비자를 받아 자식을 '변칙 유학' 보냈다는 거죠. 정 후보는 미국 방문 9일 만에, 부인과 아들 딸은 이듬해 귀국해 조기 유학을 빨리 준비하기 위해 편법을 쓴 것 아니냐는 지적이 일었고, 음주운전 물의 등과 맞물려 자진 사퇴했습니다.
2005년 이기준 부총리 사임 후 두 달 만에 강동석 건설교통부 장관도 사임합니다. 이번에는 차남 취직이 문제였죠. 강 장관의 차남은 2003년 11월 인천경제자유구역청 경력직에 단독 응시했다가 서류전형에서 탈락하고 이듬해 1월 재응시해 합격했는데, 재응시 때 '아버지가 건교부 장관'이라는 보고가 면접관들에게 전해졌다는 겁니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의 전직 간부가 압력설을 폭로하고 부패방지위원회도 '다소 의심되는 부분이 있다'며 감사원에 조사를 의뢰하면서 강 장관은 의혹 제기 이틀 만에 사의를 표명했습니다. 차남도 회사를 그만뒀고요.
문재인 정부에서 낙마한 장관 후보자들도 부모찬스 논란을 피하긴 어려웠습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에 지명된 조동호 카이스트 교수도 아들 황제유학, 병역‧취업 특혜 의혹으로 낙마했죠. 두 아들 유학비에 7년 동안 7억 원이 든 것도 '국민정서'에는 어긋나는데, 희한하게 아들 입학식 졸업식 날짜에 맞춰 조 후보가 해당 학교 근처로 7번이나 출장을 갔다는 겁니다. 이렇게 쓴 출장비가 5,000만 원에 달하죠.
조 교수도 결국 자식 취직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장남이 인턴 근무한 동원올레브에서 조 교수는 사내이사를 지냈고, 차남은 카이스트 위촉기능원으로 일한 사실이 알려졌거든요. 조 교수가 국방부 자문위원에 위촉된 해에 장남은 한미연합사령부 통신병에 배치됐죠. 이쯤 되자 청와대가 나서서 지명을 철회합니다.
국회의원도 예외가 아닙니다. 딸의 'KT 채용비리' 사건으로 법정에 선 김성태 전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의원은 올해 2월 대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 최종 유죄판결을 받았죠. 김 전 의원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이던 2012년 국정감사 기간 이석채 전 KT 회장의 증인 채택을 무마해주는 대가로 딸의 정규직 채용이라는 뇌물을 받은 혐의로 2019년 7월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딸은 2011년 파견 계약직으로 KT스포츠단에 입사해 일하다 KT 신입사원 공개채용에서 최종 합격해 정규직이 됐죠.
2015년 윤후덕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19대 국회 당시 딸이 자신의 지역구(경기 파주)에 위치한 LG디스플레이에 지원한 뒤 해당 회사 대표에게 전화를 건 사실이 드러났죠. 법원은 특혜채용 의혹을 '혐의 없음'으로 판결했고, 윤 의원이 "(전화를 건 건) 부적절한 처신이었다"며 사과하며 일단락됐습니다.
우리나라 첫 여성 국무총리는 2006년 이해찬 전 총리에 이어 임명된 한명숙 전 총리죠. 2002년 첫 여성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된 장상 전 이화여대 총장이 국회 임명동의를 받는 데 실패했는데, 그때 장 전 총장이 국회 문턱을 넘었다면 우리 헌정사가 바뀌었을 겁니다. 역사를 바꾼 건 아들 군대 문제였어요. 유학 시절 낳은 장남이 이중국적자였는데, 미국 시민권을 이용해 병역을 면제받았죠. 장 전 총장은 논란 끝에 지명 직후 '국무총리 서리'로 먼저 업무를 시작했는데, 취임 첫날 장남이 국내 의료보험혜택을 받고 병원에 입원 중인 게 밝혀져 여론이 더 악화됐습니다.
MB정부에서는 김병화 대법관 후보가 아들 병역문제로 대법관 인사청문회 도입 이래 첫 낙마자라는 불명예를 얻었습니다. 아들이 공익근무요원으로 하필, 서울중앙지법에 배치된 게 석연찮다는 거죠. 김 후보 아들은 애초 근무지역으로 장애인 주간보호센터를 신청했었어요. 한데 갑자기 취소하고 한 달 뒤 서울지법 결원 1명을 선착순으로 모집할 때 1등으로 신청해 이곳에서 복무합니다. 병무청 사이트에 공고 흔적도 없었죠. '1등 비결'이 내부 정보 이용 아니냐는 건데 여기다 위장전입, 세금탈루 의혹이 더해져 김 후보는 자진 사퇴했습니다.
야당에서는 아예 MB정부 고위공직자 자녀들의 군 입대 사항을 전수조사했습니다. 2011년 국감에서 안규백 민주당 의원이 국방부의 'MB정부 고위층 자녀 병역이행 현황'을 분석한 결과 대통령실, 행정부 장차관급 인사의 직계비속 70명 중 28명이 행정·보급·정보·정훈·산업특례 같은 '꽃보직'에 있거나 서울 및 서울 근교 부대에서 복무했습니다. 특히 청와대 수석 12명의 아들 11명 중 9명이 '꽃보직'을 받았고, 3명은 서울 근교에서 군 생활을 했더군요.
그래도 '부모찬스'는 유구히 이어졌습니다. 박근혜 정부에서 초대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된 김용준 대통령직인수위원장, 두 아들 병역과 재산 문제로 자진 사퇴했습니다. 두 아들은 각각 신장‧체중, 통풍을 이유로 제2국민역(면제) 판정을 받았는데, 1990년대 말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의 아들 병역면제 의혹으로 군검찰이 사회지도층 병역 비리를 내사하는 과정에서 이 사실이 확인됐지만, 공소시효 만료로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김용준 위원장은 아들 재산 문제도 입방아에 올랐죠. 장남은 7세인 1974년 경기 안성군에 당시 시가로 1억6,300만 원에 이르는 임야 2만여 평을 취득했고, 이듬해 동생과 함께 공동으로 서울 서초동 주택을 취득했죠. 김 위원장이 헌법재판소장으로 임명된 1993년 20대 초중반이었던 두 아들 재산이 18억여 원이었는데, 2013년 총리 지명 후 이 주택은 땅값만 호가 40억 원이 넘었습니다.
MB정부에서 환경부 장관 후보로 지명된 박은경 대한YWCA연합회 회장도 부동산 투기, 자녀 편법 증여 의혹 등으로 낙마했죠. 당시 장남이 1억 원이 넘는 결혼축의금을 고급아파트 분양받는 데 썼고, 14억5,000만 원에 달하는 서울 목동의 고급 주상복합아파트도 편법으로 증여받았다는 의혹이 나왔습니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됩니다. 2019년 전국 아파트값 폭등에 구원 투수로 지명된 최정호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가 장녀 아파트 증여 문제로 자진사퇴했죠. 국토부 노조가 이례적으로 '환영 성명'을 낼 정도로 부처 내 신망이 높았지만 최 후보 명의의 아파트 두 채 중 한 채를 장관 내정 직전 딸에게 아파트를 물려주고 그 집에 월세로 거주해 '꼼수 증여'란 비판이 나왔습니다.
고위공직자의 자녀 특혜 비리가 드러날 때마다 정치권은 각종 '방지법'을 내놓았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조국 사태'가 터진 2019년 국회의원, 고위공직자 자녀의 입시비리 조사 관련 법안이 4건 발의됐지만 20대 국회 종료와 함께 폐기됐죠.
새 정부 출범을 앞둔 요즘은 '정호영 방지법'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공직자의 이해충돌 범위를 자녀 입시, 취직까지 넓혀 살펴보자는 거죠. 정 후보는 억울할 수 있겠으나, '국민 눈높이'에서 부모찬스가 의심스러운 게 사실이니까요. 21대 국회에서는 성과를 내 의혹도, 억울함도 없어지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