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가 그럴 사람이야?" 남편은 시댁 편만 들어요

입력
2022.04.25 04:30
24면

편집자주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원가족을 우선하는 남편 때문에 이혼 위기에 있는 40대 회사원입니다. 남편은 시댁 식구들이 어떤 부당한 행동을 해도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고만 해요.

남편이 해외 근무 중일 때 유치원생이던 작은아이가 크게 아픈 적이 있었어요. 신종플루에 걸려 열이 40도가 넘었고 생사를 오갔습니다. 혼자 감당하기 어려워 시누이 집에 초등학생이던 큰애를 잠시 맡기려고 했어요. 그러자 시누이는 "우리 애들한테 옮으면 어떻게 할 거냐"며 단번에 거절했습니다. 아주버님은 전화로 심한 욕설을 퍼붓기까지 했어요. 휴대폰 문자로도 욕을 계속 하기에 남편에게 그대로 보내줬습니다. 그랬더니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 안 되니까 그러는 거 아니냐"고 하는 겁니다. 남편은 이후 시누 가족을 만난 자리에서도 이 사건에 대해 아무 언급이 없었습니다. 저는 최소한 "섭섭했다"고 하거나 "왜 그랬냐"고 물어볼 줄 알았어요.

시어머니와의 갈등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어머니가 직장 일로 바쁜 저 대신 초등학교 2학년이던 큰애를 데리고 둘째 유치원 행사에 참석한 적이 있어요. 큰애가 "집에 왔는데 배고프다"고 전화가 왔기에 물었더니 할머니가 아이들만 집 앞에 내려주고는 그 택시를 타고 그대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남편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우리 엄마가 그럴 사람이냐"고 하더군요. 아이들이 할머니가 자기들보고 "뚱뚱하다"고 했다며 울었을 때도, 남편은 아이들에게 "할머니가 그럴 사람이냐"고 했습니다.

남편은 아주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들었어요. 자신의 가족사를 전혀 이야기하지 않아 다른 사람을 통해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남편과 시어머니는 결혼 전까지 한 방을 썼다고 해요. 연애할 때는 제게 "나는 우리 엄마에게 잘하는 사람이 좋다"고 말한 적이 있어, 모자가 각별한가 보다 생각했습니다. 특이한 건 시어머니가 결혼 후에도 명절에 만나면 꼭 아들 옆에서 자려고 한다는 겁니다. 남편도 이를 거절하지 않습니다.

남편은 7년간 외국에서 근무했습니다. 지금은 대학생, 고등학생이 된 두 아이 양육은 오롯이 제 몫이었죠. 중학생이던 큰애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는데, 자해를 해서 병원 치료를 받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어요. 그런데 남편은 그때도 아이가 어떤지 안부조차 묻지 않았어요. 혼자 10명 넘는 가해 학부모를 상대해야 했는데 "그러냐"고 무신경하게 굴고, 오히려 애한테는 "정신력이 약하다"고 상처를 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들 학교 행사에 참석한 적도 없어요. 해외 근무를 하는 동안 1년에 2번 정도 휴가를 나왔는데 이것도 다 명절 때 시댁에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매사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합니다. 몇 년 전, 첫째가 장염으로 병원에 입원했는데 남편은 축구 모임이 있다며 밤 11시에 귀가했습니다. 제가 크게 화를 내고 당신이 간호하라고 했더니 아이가 퇴원하자마자 이혼하자고 하더군요. 저도 이혼하고 싶지만 아이들이 이혼을 원치 않아 고민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됐는지, 남편은 왜 이러는지, 결혼 생활 내내 저를 괴롭혔던 문제를 이제는 해결하고 싶습니다.

한지은(가명·48·회사원)

지은씨, 사연을 읽으면서 결혼 생활 내내 당신이 느꼈을 섭섭함, 서운함, 외로움이 느껴져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당신은 남편에게 배우자라면, 부모라면 당연히 보여야 할 반응을 기대했지요. 특히 위기가 닥쳤을 때는 더욱더 가족의 편이 되어 줘야 하잖아요. 하지만 그때마다 매번 돌아오는 남편의 무심함에 너무 힘들었을 것 같아요.

두 분의 결혼 생활에 가정폭력, 외도, 알코올 중독과 같은 표면적인 큰 갈등은 없어요. 다만 이 결혼 생활에는 서로 '함께', '같이'한 경험이 빠져 있습니다. 가족이 특별히 행복했던 추억도 없고, 부부가 애쓰면서 자녀를 함께 양육하지도 않았고, 의식주를 같이 오래한 것 같지도 않아요. 심지어 치열하게 싸워 본 경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도 안에서 자식 둘을 낳았다는 것 외에는 감정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교집합'이 거의 없어 보여요.

결혼 생활이 이토록 무미건조했던 건 남편의 성격 때문인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에 남편은 자기 감정이나 생각을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좋다, 싫다, 찬성, 반대를 전혀 드러내지 않지요. 아내 앞에서 어머니가 자기와 자겠다고 하면 보통 뭐라고 할까요. "엄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내 나이가 몇 살인데"하며 거절하는 게 일반적일 거예요. 하지만 남편은 아무 말도 안 해요.

성인이 돼 결혼한 아들이 어머니 옆에서 자는 게 정말 좋아서 그랬을까요? 지은씨 남편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어머니와도, 내 아이를 가해한 아이의 부모와도, 욕을 써 보내는 시누 남편과도 감정적으로 조금도 얽히기 싫어했던 것 같아요. 남편은 그저 공식적, 형식적인 책임과 역할만 다하는 사람입니다. 결혼 후에는 경제적 가장으로서의 역할만 했지요. 남편이 해외 근무 중 휴가를 내서 명절 때만 들어왔던 것도 차례를 지내는 아들로서의 기본적인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아요. 어머니와 시댁 식구들이 너무 보고 싶고, 애틋해서 명절에 휴가를 맞춘 게 아니라요.

다만 여러 이유로 자기 어머니에 대한 형식적 책임감은 굉장히 강한 것 같아요. 그런데 아내나 자식들한테는 그마저도 안 하니까 원가족과 훨씬 가깝다고 느껴지는 거지요. 당신이 남편에게 섭섭했던 원인도 '(원가족보다) 우리 가족을 더 많이 아껴주고 사랑하지 않아서'라기보다는 '남편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않아서'라는 설명이 더 정확해 보입니다. 결정적인 상황에서 남편이 언제나 뒤로 물러나 있었기 때문이죠. 남편은 누군가를 위해 나서서 싫은 소리를 하거나, 싸우거나, 위로해주거나, 보호해 주는 사람이 아니에요. 남편은 시댁 식구를 포함해 그 누구의 편도 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남편이 많이 쓰는 표현에서도 이런 특성이 드러납니다.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이냐'라는 표현은 '우리 엄마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는, 깊은 신뢰를 드러낸다기보다 사건의 진위를 별로 파악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담고 있는 것 같아요. 감정적으로 매우 소극적이고, 수동적이고, 회피적인 단면이 드러나는 대목이지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배우자나 자식이 이런 말을 하면, 보통 '자세히 말해 봐'라고 하겠죠. 전후 상황을 듣고 판단할 거예요. 하지만 남편은 '정말 그랬겠어?'라는 말로 넘깁니다. 어떤 갈등도 그냥 흘러가게 두지요. 남편이 원가족과 관계가 더 돈독해서 이러는 게 아니라, 이건 그저 남편이 가진 문제 해결 방식이자 삶의 태도인 거예요. 이런 사람들은 어떤 액션도 취하지 않기 때문에 남들이 보기에는 점잖고 착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기 쉽지요.

남편은 불안정애착 중에서도 무시형 불안정애착 유형으로 보입니다. 무시형 성인들은 문제가 없을 때는 대체로 다른 사람들과 잘 지냅니다. 그러나 일단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이를 귀찮아하고 어떤 식으로든 피하려 듭니다. 무시형 남자가 결혼을 했을 경우, 부인이 어려움을 이야기하면 "당신이 알아서 해" 내지는 "○○이가 그럴 리가 있겠어?"라는 식으로 반응하게 되지요. 부인은 불안해지고 서운해서 더 매달리며 문제를 이야기하겠지만, 남편은 그럴수록 입을 꾹 다문 채 대화를 회피하거나 모른 척해버릴 거예요. 그러다 보면 부인도 지치고 포기하게 되어 말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됩니다.

이런 부부는 같이 살지만 대화 없이, 의논 없이, '남남처럼' 살아가는 거지요. 부모나 주양육자의 물리적, 정신적 부재가 생겼을 때, 또는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부모, 심하게 간섭하거나 잔소리가 심한 부모와 지낼 때 무시형 불안정애착으로 애착 유형을 형성하게 됩니다. 런 사람들은 타인과 가까워지거나 누군가가 자신에게 감정적으로 요구하는 것을 너무 불편해하고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거나 외면하지요. 오히려 혼자 있을 때 편안하고 안정감을 느낍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지만 타인에게는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요. 그럼 결혼을 왜 했을까, 싶지만 남편은 결혼이라는 사회적 통과의례, 이에 대한 기본적인 책임을 다한다는 생각이었을 거예요.

또한 남편에게는 아버지의 죽음이 본인한테 평생 큰 상처였을 겁니다. 감정의 동요가 큰 사람이나 감정이 많이 소모되는 사안에 대해 거부감이 클 가능성이 높지요. 그러니 따돌림을 당해 괴로워하는 아이한테 "정신력이 약하다"고 말했을 거예요.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며 살아왔을 것이고, 스스로도 자신은 정신적으로 강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안타까울 따름이지요. 그러나 남편도 살아가기 위해 자기 방식대로 애써온 것이지요.

이 결혼 생활은 남편이 상당 기간 외국에 나가 있어서 지금까지 유지됐던 것 같아요. 물리적인 거리로 정서적인 거리를 합리화시키면서요. 그런데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갈등이 불거질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당신도 점점 더 남편에게 감정적인 역할과 책임을 요구했을 것이고, 당연한 요구여도 남편은 이를 견디기 어려웠을 겁니다. 가족의 굴레를 다 벗어 던지고 싶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아이들도 어느 정도 컸으니 아버지로서 최소한의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면도 있는 것 같아요.

정서적 상호작용, 감정의 교류가 없는 결혼 생활은 더 이상 유지할 이유가 없을 거예요. 다만 당신이 이혼할 마음이 없다면, 예전처럼 물리적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결혼 생활을 형식적으로 유지하며 지내는 게 최선으로 보입니다. 졸혼한 사이처럼 지내면서 남편에게 정서적인 지지나 공감은 기대하지 않은 채로요.

지은씨, 지금까지 홀로 그 많은 짐을 짊어지고 두 아이를 키우느라 너무 고생 많았고 애썼다는 말을 꼭 해주고 싶어요. 얼마나 힘들었을지 눈에 선합니다. 당신은 아직 젊어요. 평균 수명을 100세로 보면,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습니다. 내게 남은 이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고 편안하게 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고 현명한 결정을 내렸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펼쳐질 당신의 소중한 인생을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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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송옥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