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Z세대다. 고로 내가 원하는 길을 간다. 종·합·격·투·기"

입력
2022.04.23 12:00
21면
종합격투기 '세미프로 1위' 오른 17세 이성제군
나이 열살가량 많고 키 큰 상대 1라운드서 잡아
승점 달린 경기들서 20대 이상 성인 상대 KO승
한때 교내 '영재반' 공부 잘해...이젠 운동에 전념
"올해 10대 프로선수 데뷔하고파...UFC무대 꿈"


"무조건 1라운드에서 끝내자는 게 제 목표입니다. 어차피 제가 기절하나 상대가 기절하나 둘 중 하나는 기절하니까요."

승부욕이 대단하다. 자신보다 어깨 하나가 더 있는 큰 선수를 단 3분 만에 제압하다니. 복싱이나 유도, 레슬링, 주짓수 등 온갖 무술로 상대를 쓰러뜨리며 인정사정없는 종합격투기 무대에서 말이다. 그 주인공은 '10대 파이터' 이성제(17·덕이고) 군으로, 국내 종합격투기 세미프로 랭킹(로드 투 브레이브·플라이급) 1위에 오른 '신성'이다.

이군은 지난달 무려 자신보다 열 살가량 많은 상대를 무력화시키며 '깜짝' 스타가 됐다. 프로로 데뷔하기 전 단계인 세미프로에서 10대 선수가 1위에 오른 건 이례적인 일이다. 그것도 올해 세미프로에 데뷔한 데다 경험이 많지 않은 일반 고등학생이 프로 선수들과 대결할 정도로 실력 있는 상대를 이겼으니 사건은 사건이었다.

종합격투기는 '아마추어-세미프로-프로' 단계로 나뉜다. 세미프로에는 이군 같은 아마추어 선수뿐만 아니라 국가대표나 실업팀 출신 선수들도 포진해 있어 선수당 편차가 심한 곳이다. 그래서 이군처럼 10경기도 치르지 않은 평범한 학생이 도전장을 던질 만큼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승점을 딸 수 있는 실전 경기에서 2전 전승으로 활약한 이군의 재능이 빛나는 이유다.

'코리안 좀비'로 불리는 한국 대표 파이터 정찬성이 롤모델이라는 이군을 직접 만나봤다.


시합 일주일 전 대체 선수로 섰을 뿐인데..."쉽게 위축되지 않는 선수"

이군은 어려운 상대를 연이어 꺾으면서 눈길을 끌었다. 게다가 4분 동안 2라운드로 펼쳐지는 경기에서 모두 1라운드에 승패를 갈라 더욱 주목받았다. 특히 지난달 경기는 더욱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상대의 경험과 실력이 뛰어난 것을 차치하더라도 시합 일주일 전에 대체 선수로 등판했기 때문이다.

당시 그가 뛴 경기는 원래 다른 선수가 서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해당 선수가 사정상 못 뛰게 되면서 이군에게 출전 제의가 들어왔다. 준비할 시간이 부족해 사실 거절해도 그만이었다. 그러나 스스로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는 "격투 선수가 상대를 골라 싸우는 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며 "내가 이길 수 있는 사람하고만 경기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번 경기에서 승리한다면 왠지 앞으로 두려울 게 없을 것 같았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시합 당일까지 긴장한 건 사실이었다. 상대가 자신보다 키가 더 크다는 걸 알고 놀랐다고 했다. 주변에선 "네가 지겠다" "너는 고등학생이니까 져도 괜찮다" 등 응원보다 걱정이 많았다. 시합도 하지 않았는데 패배할 거라는 주위 반응이 이군을 더 뜨겁게 만들었다고. '꼭 이겨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내가 1라운드에서 KO시킬 거다"고 농담식으로 말했다는 것이다.

막상 경기를 시작하고는 '충분히 해볼 만하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상대가 먼저 목을 조르는 기술로 이군을 쓰러뜨렸지만 기회를 엿본 이군이 역습해 펀치를 날렸고, 1라운드가 시작한 지 3분 만에 승패를 갈랐다. 이군이 장난스럽게 한 말처럼 정말 'KO'를 시킨 것이다.


이런 파이터로서의 배포는 이미 관계자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경기 도중 얼굴을 가리는 '가드(권투에서 선수가 상대편의 주먹을 막기 위해 취하는 팔의 자세)'를 풀고 두 팔을 벌려 공격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웬만한 '강심장' 아니고서는 취할 수 없는 자세다. 그런데 10대 소년의 배짱 두둑한 경기력은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이군은 이에 대해 "상대가 아무리 세다고 해도 가드를 연다"며 "일종의 마인드 컨트롤이자 전략"이라고 했다. "상대가 나보다 약하다고 생각해야 긴장을 덜하게" 될 뿐만 아니라, "상대를 기선제압하기 위한 전술"이라는 것이다.

이군을 지도하는 '팀에이스 야당'의 채동우 관장은 "성제는 경기 중 가드를 여는 몇 안 되는 선수"라며 "자신보다 나이가 많거나 덩치 큰 선수와 대결하면 위축되는 게 당연한데 성제는 그런 게 덜하다. 링 위에서 자신이 최대한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하면서 경기하는 선수"라고 평했다.

이군의 경기를 보면 이기고도 그 흔한 '승리 세리머니' 하나 없다. 그저 글러브 낀 손으로 머리를 쓱 문지를 뿐이다. 이군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속이 꽉 찬 답이 돌아왔다.

"상대는 프로 선수들과 경기하는 등 많은 면에서 저와는 비교가 안 됐어요. 솔직히 잔뜩 겁먹어 있었거든요. 하지만 시합하면서 자신감이 생겼고, 승리한 순간 '럭키펀치(운 좋게 이긴 것)'가 터진 것처럼 보이는 게 싫었어요. 나중에 상대할 또 다른 선수들에게 쉽게 보일까봐요. '난 이길 걸 예상했다'는 식으로 차분하게 머리를 넘겼죠. '쟤 이길 줄 몰랐구나' 보다는 '쟤 장난 아니다'는 말을 듣고 싶었어요. 그래야 10대라고 얕잡아 보지 않잖아요."


"제 친구들은 꿈이 없다지만, 저는 UFC 무대에 빨리 서고 싶어요"

이성제 군은 일찌감치 자신의 꿈을 찾았다. 올해 안에 프로 무대에 데뷔해 '10대 파이터'로 이름을 알리고 싶다고 했다. 종합격투기 분야에서 10대 프로선수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데뷔 그 자체 역시 '사건'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화제성에 집중한 건 아니다. 이군의 목표 의식은 보다 뚜렷하다. 프로가 되면 더 큰 무대에 설 수 있고, 관객들의 응원과 환호 속에서의 경기는 '밥벌이'와도 연결된다고 말했다.

"제가 원하는 운동을 하면서 삶에 만족도를 높이고 더불어 돈까지 벌 수 있으면 금상첨화라고 생각해요. 싫은 걸 억지로 하며 사는 것보다 좋아하는 걸 하면서 스스로 삶을 개척해가는 게 행복 아닐까요? 부모님은 프로 데뷔하는 것을 무척 걱정하시지만 어떻게든 설득할 겁니다. 자신 있어요."

비록 10대지만 자유분방하면서도 당당한 사고를 지닌 걸 보면 Z세대답다. 현실지향적인 삶의 태도 역시 Z세대다운 면모다. 사실 종합격투기를 시작한 것도 이군의 의지였다. 부모 손에 이끌려 운동을 시작한 게 아니라 애초부터 스스로 운동에 빠졌다.

프로레슬링을 막연하게 좋아하던 초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레슬링을 하는 체육관에 다녔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동네에 하나둘씩 생긴 격투기 체육관에 눈이 갔다. 그곳에서 레슬링뿐만 아니라 복싱, 주짓수 등 다양한 무술을 목격했다. 방과 후 친구들과 함께 체육관에서 운동하는 게 즐거웠다. 하지만 부모님께 정식으로 운동을 배우고 싶다는 말은 꺼내지 못했다.


이군은 6학년 때 교내 영재반에 들어갈 만큼 학업 성적도 좋았다. 장남이기도 해서 부모의 기대를 한몸에 받다 보니, 운동하겠다는 말을 꺼내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꾀를 냈다. "엄마한테 체육관 다니고 싶다고 하면 반대할" 게 뻔하니, "체육관 가서 운동하며 스트레스 풀겠다"고 했단다. 공부 잘하는 아들이 스트레스 풀겠다는데 마다할 부모가 어디 있을까. 이군의 부모는 몰랐겠지만 이때부터 그는 종합격투기를 본격적으로 접하게 됐다. 고등학생 된 후에는 아마추어 경기에 나서며 실전 감각을 키웠다.

그렇다고 공부를 게을리하진 않는다. 예전에 비해 성적은 많이 떨어졌지만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래서 다음 달 중간고사를 위해 잠시 체육관 방문도 미뤄둘 참이다. 랭킹에 영향을 주는 승점이 걸린 다음 달 경기도 뛰지 않을 생각이다.

대학 진학은 부모님의 뜻이 많이 반영됐다. 이군은 "솔직히 대학가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다. 프로 데뷔한 뒤 세계적인 무대인 UFC에 빨리 서고 싶었을 뿐"이라고 했다. 이군의 부모는 아들의 프로 데뷔에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미래에 대해선 현실적인 조언을 했다. "미래에 대한 계획도 세워야 한다"며 "혹시라도 부상을 당해 선수 생활을 보장받지 못한다면 다른 길도 모색해봐야 한다"고 말이다.

이군은 이런 부모님의 조언을 가슴 깊숙이 받아들였다. 프로의 세계는 그야말로 냉혹하고 잔인하기 때문이다. 이군도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도전 자체를 겁낼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10대라서 성인들과 비교해 체력적인 면에서 근육의 질도 다르고 완력 등이 약하다고 해요. 하지만 지금까지 20대 이상 성인들과 대등한 경기를 해왔어요. 프로(선수) 글러브는 아마추어나 세미프로 글러브보다 훨씬 얇아서 '생명을 깎아 먹는다'는 말이 있어요. 그래서 더 일찍 프로 세계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충분히 이겨낼 수 있어요!"

강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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