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A(24)씨는 지난해 12월 겨울방학을 앞두고 서울 금천구 소재 J사의 택배기사 모집에 지원했다. 취업 사이트에서 본 이 회사 채용 공고엔 '화물차가 없으면 회사 차를 빌려주겠다' '월 수입 400만~500만 원을 보장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아버지가 건설 현장에서 추락 사고를 당해 A씨는 취업 준비보다 집안 생계를 돕는 게 급했다.
서류전형 합격 통보를 받고 회사로 찾아간 A씨에게, 면접관을 맡은 직원은 지원 동기, 소속 대학 등을 물었고 "어린 나이인데 참 기특하다"고 격려도 했다. 면접이 끝나자 그는 바로 계약하자더니 서류 대여섯 건을 내밀고 불러주는 대로 빈칸을 채우라고 했다. 차종 옆엔 '봉고3 내장', 대출금엔 '1,740만 원', 이자엔 '16.9%'라고 적게 했고 캐피탈회사에서 입금된 돈을 회사 대표 계좌로 이체하게 했다. 그러면서 "차를 빌려주면서 보증금을 받는 절차" "대출금은 모두 회사가 상환할 것"이라며 A씨를 안심시켰다.
A씨는 뒤늦게 사기를 당했다는 의심이 들었다. 계약 서류를 살펴보니 A씨 명의로 자동차담보대출을 받아 중고차를 산 것이고 대출금도 본인이 5년간 원금과 이자 800만 원을 갚아야 했다. 차량을 확인했더니 2018년 출고돼 10만㎞ 이상 주행한 터라 시세가 1,000만 원에 불과했다. A씨의 항의를 받은 회사는 "다 알고 서명한 것 아니냐"고 대답했다. J사 대표 등을 경찰에 고소한 A씨는 "구직자 입장에서 면접관이 기분 나빠할까봐 자세히 묻지 못했다"며 후회했다.
경찰이 한 업체가 택배기사 채용을 미끼로 고금리 대출과 연계된 중고 택배차량을 강매했다는 피해자 고소를 여러 건 접수하고 수사에 나선 것이 확인됐다. 택배업계에선 코로나19 유행기에 택배 시장이 확대되면서 이에 편승한 취업 사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22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서울 금천경찰서는 J사 대표 등 회사 관계자들을 자동차관리법 위반, 사기 등의 혐의로 입건해 조사하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이 회사는 택배기사 채용 공고를 보고 찾아온 구직자들에게 택배차를 빌려주겠다고 속여 중고 화물차 매매 계약을 체결하도록 한 혐의를 받고 있다.
피해자들은 J사가 자신들에게 받아낸 서류로 캐피탈회사에서 연 16% 수준의 고금리 차량담보대출을 받도록 하고 시세보다 700만~1,000만 원가량 비싼 가격에 중고차를 팔았다고 주장한다. 경찰이 접수한 J사 고소 사건은 A씨 사례를 포함해 최소 3건으로 알려졌다. 한 피해자 측은 "J사가 특정 중고차 매매업자와 캐피탈회사와 결탁해 범행을 반복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회사를 그만둬야 했던 피해자 B(38)씨는 J사에 재취업하려다가 2,900만 원 상당의 택배차량을 떠안게 됐다고 한다. 뒤늦게 취업 사기라고 생각해 환불을 요구하자, 회사는 "계약서에 직접 서명하지 않았느냐"며 거부하면서 "차량 포기 각서를 쓰고 다른 사람에게 차를 빌려주면 대여료를 받아 차값을 변제할 수 있다"며 역제안을 했다. B씨는 그 말을 따라 몇 달간 돈을 입금받았지만, 차를 빌린 사람이 사고를 내자 도로 월 64만 원 이상 대출을 상환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차량 명의자는 여전히 B씨라서 다음 달부터는 사고에 따른 1,200만 원의 보험 할증료도 내야 한다. 회사 측은 차량 대여기간 중 회사가 부담한 차값과 보험료 600만 원을 주지 않으면 차를 내줄 수 없다는 입장이라, B씨는 차를 팔아 대출을 갚을 수도 없는 처지다.
택배업계에선 코로나19 사태 이후 이 같은 수법의 택배기사 취업 사기가 급증했지만, 피해자가 돈을 돌려받기는 힘든 구조라고 입을 모은다. 되레 회사 측에서 계약서 작성 과정을 녹음·녹화한 뒤 이를 "계약이 정상적으로 체결된 증거"라고 제시하며 맞소송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택배기사 온라인 커뮤니티를 7년째 운영하고 있는 한남기(40)씨는 "택배기사가 돈을 많이 번다는 막연한 얘기를 듣고 택배업에 뛰어드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피해 사례도 늘고 있다"며 "사기 피해자 대부분은 택배기사가 개인사업자라는 사실도 모르는 사회초년생"이라고 말했다.
택배기사 취업 사기 사건을 다수 고발한 김범수 행정사는 "상식적으로는 사기가 분명하지만, 어쨌든 피해자가 직접 계약서를 작성하다 보니 사기죄로 단죄하기가 쉽지 않다"며 "다만 자격 없는 회사가 자동차 매매를 알선한 만큼 자동차관리법 위반으로 처벌되는 사례는 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