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녕의 가장 남쪽에 남지읍이 있다. 들도 넓고 강도 넓어 인심도 물산도 넉넉해 보인다. 함안·의령과 마주 보는 낙동강 자락은 해발 200m에 미치지 못하는 고만고만한 산봉우리로 연결된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산이랄 것도 없지만, 시장이든 학교든 남지읍을 오가야 하는 골짜기 주민들에게는 커다란 장애물이었다. 힘들게 고갯길을 넘는 대신 위험하게 강자락을 걷다 불의의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 사람 겨우 지날 정도의 그 벼랑길을 정비한 ‘개비리길’이 요즘 입소문을 타고 있다. 능선으로 이어지는 산길까지 정비해 숱한 옛이야기를 더한 길이다.
개비리길은 남지읍 낙동강 수변공원 북측 용산리 주차장에서 영아지마을까지 돌아오는 걷기길이다. 마분산 능선을 넘어갔다가 강자락으로 돌아오는 약 6.4㎞ 코스로 2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말뜻을 그대로 풀이하면 ‘갯가의 벼랑길’이지만, 지역에서는 견공의 모정으로 생겨난 길이라 소개한다.
옛날 영아지마을에 사는 황씨 할아버지의 누렁이가 11마리의 새끼를 낳았는데 젖먹이 경쟁에서 밀려난 한 마리가 유독 조그마한 ‘조리쟁이’였다. 작고 볼품이 없다는 뜻의 지역 사투리다. 할아버지는 새끼들이 크자 10마리는 남지시장에 내다 팔고, 가엾게 여긴 조리쟁이만 집에 남겨 두었다. 산 너머 용산마을(알개실)로 시집간 딸이 자신이 키우겠다며 데려갔는데, 친정의 누렁이가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와 새끼에게 젖을 먹이고 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떻게 산길을 넘었을까. 폭설이 내린 어느 날 누렁이의 뒤를 쫓아 보니 산길이 아니라 눈이 쌓이지 않은 낙동강 절벽을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위험하지만 힘이 덜 드는 지름길이었다. 이후 주민들도 이 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두 마을을 오가게 됐다고 한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라 사실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지만, ‘강가의 벼랑길’이라는 정직한 해석보다는 견공의 모정을 입힌 감동 이야기에 더 끌린다.
마분산(180m)으로 오르는 길 초입은 가파른 목재 계단으로 시작된다. 단숨에 산 중턱까지 오르니 높지 않아도 제법 숨이 차다. 군데군데 탱자나무 울타리와 개복숭아나무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외딴집이 더러 있었던 듯하다. 능선 부근에 닿으면 길은 한결 순탄해진다. 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창나리’ 전망대를 세워 놓았다. ‘창나루’를 지역 사투리 그대로 옮긴 말이다.
지금은 사라진 창나루는 창고가 있던 큰 나루였다고 한다. 6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지역의 주요 교통수단은 나룻배였다. 남지는 일대의 중심 상권이었다. 강 건너 함안 대산면과 칠서면, 의령 지정면 주민들은 나룻배를 타고 남지장을 이용했다고 한다. 1969년 추석 대목에는 50명 정원의 나룻배에 128명이 승선했다가 배가 남지철교 교각 아래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는 바람에 93명이 숨지는 참사를 당하기도 했다. 당시 가까스로 살아남은 7살배기는 지금 남지읍 이장단 단장을 역임하고 있다.
전망대에 오르면 낙동강이 우에서 좌로 흐르고, 정면으로 또 다른 강줄기가 T자 모양으로 합쳐진다. 산청 진주 함안을 거쳐 낙동강과 합류하는 남강이다. 지역에서는 이곳을 ‘기음강(岐音江)’이라고도 부른다. 다소 물살이 거센 낙동강과 잔잔하게 흐르는 남강의 물소리가 달라 소리로 구분되는 강이라는 의미다. 기음강 유역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21일째 되는 날, 곽재우 장군이 이끄는 의병이 낙동강을 따라 북상하는 왜선 14척을 격퇴한 곳이기도 하다. 의병군의 첫 승리로 기록된 기음강 전투다. 당시 장군의 지혜로운 전술은 마분산의 전설로 남아 있다.
마분(馬墳)은 말 무덤이라는 뜻이다. 산 정상에 석축으로 테두리를 두른 무덤이 있다. 마분으로 추정되는 곳인데 현재는 2기의 민간인 봉분이 자리 잡고 있다. 사연은 이렇다. 의병이 낙동강과 남강을 오르내리며 왜병과 전투를 벌일 당시 곽재우 장군이 말 등에 벌통을 매달아 적진으로 돌진케 했다. 쏟아져 나온 벌들에 왜군 진영은 큰 혼란에 빠졌고, 이 틈을 타서 의병은 힘들이지 않고 승리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벌통을 메고 달린 말은 적에게 사살되었고, 뒤에 그 희생과 충의를 기리기 위해 사채를 수습해 봉분을 만들었다. 무덤에는 당시 희생된 의병들도 함께 묻혔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고 산길에 우국충정의 근엄한 분위기가 감도는 건 아니다. 말 무덤에서 조금 더 가면 길섶에 여러 사람의 이름이 새겨진 작은 바위가 보인다. 50~60년 전 꼴을 먹이기 위해 산등성이까지 소를 몰고 온 어린 목동들이 새긴 이름이다. ‘정규환 황준순 정호성 진종규 황선도’ 등은 실제 남지읍에 거주한 사람들이다. ‘나무 심어 사태 막자’라는 표어도 새겨져 있다. 민둥산을 울창한 산림으로 가꾸고자 했던 당시의 산림녹화 정책이 엿보이다.
그 결실일까. 오솔길 양쪽으로 소나무가 빽빽하다. 굵지는 않지만 솔숲의 정취로 부족함이 없다. 거세게 불어오는 강바람 탓인지 밑동에서부터 갈라져 자란 나무가 많다. 산 이름을 따 ‘마분송’이라 부른다. 다섯 개의 원가지 사이에 벚나무 한 그루가 뿌리내린 특이한 나무에는 ‘6남매’라는 이름을 붙었다.
나무 한 그루에도 이야기를 입히는 정성은 강자락에도 남아 있다. 밑동에서부터 원가지가 엉키면서 하늘 높이 자란 두 그루 팽나무는 연리지로 보호하고 있다. 두 가지 사이에 돌 하나를 단단하게 물고 있는 감나무도 있다. 무슨 이벤트처럼 ‘여양 진씨 감나무 시집 보내기’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단옷날 감나무나 대추나무를 괴롭히면 나무가 꽃을 많이 달게 된다는 믿음에서 비롯됐다. 실제 생존의 위협을 당한 나무는 해거리를 하지 않는다고 하니 미신이 아니라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혜의 산물이다.
산길은 영아지 전망대에서 끝이 난다. 언덕에서 바로 내려다보는 위치라 낙동강 물줄기가 더 넓고 장엄하게 보인다. ‘아지’는 앞이 가려져 있는 동리나 앞마을(앞실)을 가리킨다. 아지리에는 영아지와 창아지, 2개의 마을이 있다.
영아지마을부터는 강자락을 따라 돌아온다. 누렁이가 개설한 그 개비리길이다. 왼쪽으로는 깎아지른 바위 절벽이 이어지고, 오른편으로는 나뭇가지 사이로 푸른 강물이 펼쳐진다. 강둑으로 아름드리 상수리나무가 버드나무처럼 가지를 드리우고, 초록이 오르는 마삭줄이 바닥을 뒤덮고 있다. 연둣빛이 눈부신 나뭇잎 사이로 강 건너 의령군 시골 풍경이 평화롭게 펼쳐진다. 바람이 살랑거릴 때마다 발아래 강물에서 잔잔한 파도소리가 들린다. 소리에 따라 남강과 낙동강을 구분한 이유를 알겠다. 이따금씩 햇살이 부서진다. 소풍 가는 것처럼 발걸음은 가볍고 마음은 평온하다.
돌아오는 길 중간쯤에 난데없이 울창한 대숲이 나타난다. 이름하여 죽림쉼터다. 여양 진씨 재실인 회락재(匯洛齋)가 있었던 자리로, 방치돼 있던 건물을 철거하고 봉두난발로 어지럽게 자란 대숲을 정비해 쉼터로 꾸몄다. 강바람이 불고 울울창창 대숲이 물결처럼 일렁거리면 노곤한 봄기운에 청량감이 더해진다. 길이 끝나는 마지막 쉼터에는 양버즘나무 한 그루가 사방으로 가지를 뻗어 하늘을 가리고 있다. 부지런히 강을 오르내렸을 나룻배와 나루터의 옛모습이 그려진다.
개비리길 입구에서 강둑을 따라 남지 읍내로 내려오면 국내 최대 규모(110만㎡)라 자랑하는 유채꽃밭이 펼쳐진다. 매년 4월 낙동강유채축제가 열리는 곳이다. 흐드러지게 핀 유채꽃이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푸른 강물과 어우러져 거대한 봄 풍경화를 그린다. 코로나19로 2년간 꽃밭을 폐쇄했지만 올해는 누구나 맘껏 산뜻한 봄 풍경을 즐길 수 있다. 중앙에는 한반도와 태극기 문양의 꽃밭을 조성했다. 원색의 튤립이 유채와 어우러져 봄 색깔이 더욱 진하다.
3㎞ 가까이 계속되는 유채밭은 국가 등록문화재인 남지철교 북단에서 시작된다. 창녕과 함안 사이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남지철교는 1933년 개통해 1994년까지 자동차도로로, 현재는 보행자 전용 다리로 이용되고 있다. 다리를 떠받치는 교각 위에 삼각형이나 오각형의 트러스를 설치해 물결이 치는 듯한 모습이 탄탄하면서도 우아하다.
겉보기와 달리 이 다리도 한국전쟁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남지는 낙동강전투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막아낸 최후의 보루였다. 1950년 9월 8일 미군은 북한군이 강을 건너는 것을 막기 위해 다리 중앙부 25m를 폭파했다. 전쟁이 끝난 후 1953년 복구하고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데, 트러스 일부에 당시의 총탄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 총탄 구멍 사이로 푸른 강물과 노란 유채꽃밭이 아련하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