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없는 남자들: 자연인을 향한 남자의 로망

입력
2022.04.18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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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몇 달이라도 산 속에 가서 자연인으로 살다 죽는 게 소원이에요."

은퇴 20년 차, 77세인 그는 노년기 소망을 묻는 내게 이렇게 답했다. 2012년 첫 방송 이후 '나는 자연인이다' 프로그램은 50대 이상 남성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다. '행복하고 의미 있는 노년 생활'에 대한 상상력이, 개인의 인생 기획에서나 복지정책 차원에서나 빈곤한 상태에서, '나는 자연인이다'가 눈앞에 펼쳐 보여주는 자연인'들'의 단막극 하나하나는 남성들에게 꽤 유혹적인 선택지로 여겨진다는 뜻이다.

나이 듦은 매우 젠더화된 과정이다. '한국 남자 노년'의 정체성은 한국사회라는 로컬의 문화적 맥락 속에서 삶의 전 과정에 걸쳐 진행되는 남자-되기의 보편적 규범성 아래 구성된다.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존재 선언은 물론 방송국의 홍보전략상 제목으로 뽑힌 것이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남자들의 내면 깊숙이 숨겨져 있는 어떤 존재론적 정체성 욕망의 메아리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일종의 유사 무의식의 형성이라고 할까. 어떤 남자들이 어떻게 왜 자연인이 '될까'? 자연인-되기는 한국사회에서 남자-되기와 어떤 관련성을 지닐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아내죠. 물론 너무나 고맙죠. 그렇지만 제일 무서워요." 그는 불쑥 이렇게 말했다. "코로나 전염병이 없었을 때도 사람 접촉을 별로 안 했어요. 저기 응암동 개천에 가면 바둑이나 장기 두는 노인들 있는데, 그거나 가서 구경하고…" 여기까지 말하고 잠시 침묵하던 그가 불쑥 꺼낸 '무서운 아내' 이야기는 징후적으로 들렸다. 평생 정신병 약 2종류를 먹고 버티다가 가까스로 은퇴했으니 이제 오지에 가서 자연인으로 살면서 병도 고치고 또 거기서 혼자 죽고 싶다는 그의 소망의 진원지도, 또 이 소망을 계속 지연시키거나 실패하게 만드는 장애요인도 아내라는 것인가.

자연인으로 살다 죽겠다는 남편을 막아서는 (그러니까 떠나보내지 못하는) 그의 아내는 어떤 여자일까. 그의 아내는 사람들이 내다버린 물건들을 '끊임없이' 집 안으로 갖고 들어와 쌓아둔다. 가까스로 장만한 작은 집은 아내가 끌어들인 물건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이게 다 돈인데!" 아내의 말이다. 가끔 집에 들르는 아들과 딸은 "제발 이 쓰레기들 좀 치우라고요"라고 성화하다가, 냄새 나서 더 이상 못 참겠다고 화를 내며 가버린다.

그와 그의 아내 이야기는 광복 후 한국사회에서 나고 자란 남자와 여자의 삶이라는 어떤 전형성을 가늠하게 한다. 국가 건설의 의무, 무서운 속도의 산업화, 강한 가부장제, 이성애 가족중심주의의 소용돌이 속에서 강제된 보편적·규범적 남자-되기는 실패를 전제로 수행된다. '우리가 친구 아이가'라는 남성 동맹도 모든 남자에게 적용 가능한 기술이나 서사가 아니다. '나는 자연인이다'가 보여주는 단막극의 주인공들이나, 이들을 로망으로 삼고 위로받는 남자들의 현실은 '남자다운 남자로 살기'가 남자들에게 얼마나 버겁고 힘든 일인지 가리키고 있다. 이 어려움과 실패를 '여자' 때문이라고, 여자와 꾸린 '가정' 때문이라고 여기는 것은 그런데 또 얼마나 쉬운 오해이며 동시에 꼭 필요한, 어려운 이해인가. 이 '때문에'가 여자를 매개로 구성되는 남자라는 가부장제 성별 기제로 이해될 때 '젠더 갈등'의 구조적 이해와 해결이 가능할 것이다.


김영옥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상임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