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치솟는 원자재가와 꿈쩍 않는 납품단가 사이에서 중소기업의 경영난이 가중되는 가운데, 민간 건설계약에 널리 적용돼 온 이른바 '물가변동 배제 특약'(물가변동으로 인한 계약금액 조정은 하지 않는다는 내용)은 무효라는 정부의 첫 유권해석이 나왔다. 원자잿값과 인건비 급등에 따른 손실을 약자인 하도급업체에 전가하던 오랜 관행에 제동을 건 것이어서 주목된다.
14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국토교통부는 최근 민간 건설공사 도급 시 물가변동 배제 특약이 유효한지 묻는 대한건설협회의 질의에 “상당한 이유가 없다면 도급계약은 무효가 될 수 있다”고 회신했다.
주로 원청사인 대형 건설사의 모임인 대한건설협회가 정부에 이런 유권해석을 요청한 것은 처음이다. 협회 측은 "그동안은 자재 수급에 지금만큼의 영향은 없었는데,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사태 등 처음 겪는 충격이 건설산업에 너무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어 질의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통상 1, 2년에서 길게는 4, 5년씩 걸리는 건설 도급계약 시, 정부 발주 공공공사에서는 건설 도중 물가변동에 따라 계약금액을 조정할 수 있다. 국가계약법과 기획재정부·행정안전부의 계약예규 등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간 건설계약은 갑작스러운 물가변동을 반영하기 쉽지 않다. 도급계약서에 ‘추가 비용을 청구하지 않는다’거나 ‘물가변동에 따라 계약금액을 조정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특약을 두는 일도 적지 않다. 여전히 대다수 공사현장에서 하도급업체가 직접 자재를 조달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물가변동 손실은 하도급업체가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 셈이다.
30년간 레미콘 업계에서 일한 A 대표는 "여러 업체로부터 견적을 받은 뒤 납품단가를 낮추도록 회유하면 어쩔 수 없이 계약에 응하는데, 이후 자재비가 오르면 납품단가를 맞춰주지 않는 관행이 근 20년간 이어졌다"고 말했다.
지난 11일 중소기업중앙회 등 18개 중기 단체가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가격 상승분을 납품대금에 제대로 반영해 주지 않아 중소기업의 애로가 가중되고 있다”며 납품단가 연동제 도입을 촉구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애초 물가변동 배제 특약은 공공공사에도 종종 포함돼 법원에서 수차례 유효성을 다퉜다. 하지만 대법원은 "물가변동 배제 특약이 부당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대등한 당사자 간 합의에 의한 계약이고 △물가변동을 인정할 경우, 자칫 물가하락 시 계약금액을 깎을 우려가 있다는 이유 등이 근거였다. 다만 2019년 국가계약법 개정안에 ‘부당특약 무효’ 조항이 포함되면서 공공계약에선 이런 논란이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국가계약법이 적용되지 않는 민간공사에서는 여전히 이런 특약이 관행으로 남아 있다. 민간공사에 적용되는 건설산업기본법에도 '도급계약 시 현저하게 불공정한 경우 무효로 한다’는 조항은 있지만, 현실에선 거의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부동산 분쟁 전문가인 박주봉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는 “자유 계약에 국가가 개입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동안 대법원은 소극적으로 해석해 왔는데 이번에 정부가 매우 전향적으로 해석한 것”이라며 "이런 해석이 쌓이면 향후 법원 판단에도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오랜 관행을 변화시킬 첫발은 뗐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현행 하도급법(16조의2)에서도 물가변동으로 계약 이행이 어려워지면 계약금액 증액을 신청할 수 있도록 이미 정하고 있다. 그러나 하도급업체의 ‘권리’만 규정할 뿐, 원청사나 발주사의 ‘의무’를 명시하지는 않아 사실상 강제가 불가능하다.
이은재 율촌 부동산·건설 전문위원은 “적정 공사비가 보장돼야 안전과 건축의 품질이 담보될 수 있다”며 "현실에서 유효한 법 정비가 필요한 실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