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평화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졌다. 양측이 협상안까지 마련했던 5차 회담 이후 보름이 지났지만, 돌파구 마련은커녕 휴전을 향해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되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전쟁 지속 가능성을 시사하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러시아군 만행에 처음으로 집단학살(genocideㆍ제노사이드)이라고 압박하면서 ‘강대강’ 대립으로 치닫는 분위기다. 개전(開戰) 50일째, 한때 작게나마 고개를 들었던 평화 기대감은 사라졌고 우크라이나는 또 다시 깊은 긴장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12일(현지시간) AFP통신 등에 따르면 이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평화협상이 난항에 빠졌다고 잇따라 공개했다. 포문은 러시아가 열었다.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극동지역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협상이 막다른 골목(dead-end)에 다다랐다”고 주장했다. 책임을 우크라이나에 전가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군이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거짓 주장’을 하고, 당초 합의를 뒤집고 우크라이나 전역에 대한 안전보장을 요구한 탓에 협상에 진척이 없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즉각 반박했다. 미하일로 포돌랴크 우크라이나 대통령실 보좌관은 “협상이 극도로 어렵다. 러시아 측은 협상 과정에서 대중에 압력을 가하는 전통적 압박 전술을 고집하고 있다”는 서면 논평을 냈다. 러시아가 대화 와중에도 민간인에 포격을 가하면서 희생이 늘고 있는 점을 꼬집은 것으로 해석된다.
양측은 개전 초기부터 휴전을 목표로 평화협상을 벌여왔지만, 성과를 내진 못하고 있다. 그나마 지난달 29일 터키에서 열린 5차 회담에서 우크라이나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ㆍ나토) 형태의 안보 보장 체제가 마련된다면 중립국 지위와 비핵화를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고, 러시아도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한때 휴전 기대감을 키웠다. 하지만 이후 러시아군의 민간인 학살 정황과 화학무기 사용 의혹이 잇따라 제기되면서 협상 분위기가 다시 얼어붙었다.
물론 대화가 아예 중단된 것은 아니다. 다만 양측의 협상은 교착상태인 데 반해,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 전운은 연일 짙어지고 있다. 서방 정보당국이 한목소리로 동부지역 총공격을 경고한 가운데, 이날 푸틴 대통령도 이곳에서 전쟁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재확인했다. 그는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진입은 돈바스 주민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며 “군사작전(전쟁)은 목표를 완수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개전 이후 그가 전쟁 목표를 돈바스 지역으로 한정한 것은 처음이라고 미국 뉴욕타임스는 설명했다. 전황에서 불리해진 러시아군이 조만간 동부지역 총공세에 돌입할 것임을 선언한 셈이다. 실제 이날 탱크와 병력 수송용 장갑차, 견인포 등 200여 대의 러시아군 차량행렬이 동부를 향하는 움직임이 위성에 포착됐다. 북동부 하르키우에서는 러시아군의 포격으로 민간인 7명이 숨지고 22명이 부상했다.
서방도 공세 수위를 높이면서 맞불을 놨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취재진과 만나 “푸틴은 우크라이나인의 사상까지 말살하려 한다.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일은 제노사이드”라고 밝혔다. 이어 “제노사이드를 증명하는 증거가 쏟아지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그가 러시아군의 집단학살 가능성을 언급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미 CNN방송은 이를 두고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미국의 수사적(rhetorical) 확장”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전쟁범죄’라는 표현보다 더 강한 ‘집단학살’을 언급하면서 전 세계 반러 연대를 강화시켜 러시아 고립 속도를 가속화하려는 포석이라는 분석이다. 러시아군의 집단학살에 공분한 각국이 똘똘 뭉쳐 러시아 제재와 우크라이나 지원에 나설 것이라는 얘기다. 로이터통신은 푸틴 대통령의 기자회견과 바이든 대통령의 발언을 두고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할 것이라는 아주 강력한 신호”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