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가 ‘재일조선인단체사전 1895-1945’를 펴냈다. 한일 연구자 38명이 10년간 매달린 결과물이다. 말뜻을 설명한 사전(辭典)이 아니라 역사를 기록한 사전(事典)으로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일본에서 조선인들이 결성한 단체 551개의 연혁과 활동을 수록했다.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사상·교육·노동·친목·상조 등 다양한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진 단체들 가운데는 독립운동을 펼치거나 일제의 통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친일 성향 단체가 존재한다. 동시에 임차인이나 노동자들이 권리를 지키려고 만든 단체들도 포함돼 있다. 예술인들이 결성한 단체도 있다. 다양한 군상이 타국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친 흔적이다.
사전은 단체들을 엮어서 커다란 줄거리를 만들거나 모든 단체에 ‘친일’ 또는 ‘애국’이라는 표지를 붙이지는 않는다. 그 대신 단체들을 가나다순으로 소개하면서 그들의 행적을 담담하게 드러낸다. 필자들은 발굴한 사료를 충실히 옮기는 데 집중했다. 단체들에 대한 평가는 이용자들의 몫이다. 지난달 31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민문연)에서 만난 이용창 연구실장은 “친일이라는 설명이 직접적으로 들어간 단체는 일부”라면서 “몇몇 독특한 단체들을 제외하면 ‘친일’이라는 식의 설명은 가급적 하지 않기로 필자들과 협의했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사전은 딱딱한 논문이나 보고서처럼 보이지만은 않는다. 생활사처럼 가볍게 읽히는 부분도 있다. 사건 중심으로 서술된 항목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동시에 단체들이 내놨던 강령이나 선언문은 물론, 조직도와 회원 현황에 이르기까지 자료를 충실하게 제시했다. 여기에 단체마다 그 성격을 간단하게 설명하는 ‘한 줄 요약’을 달아서 이용자의 이해를 도왔다. 예컨대 1925년부터 1926년까지 존재했던 ‘삼월회’는 ‘도쿄에서 최초로 결성된 공산주의 여성 단체’였다. 조선인 생활을 개선하려고 설립됐지만 점차 일제 통치에 협력하는 단체로 변모했던 상애회의 기원인 ‘상애회 도쿄총본부’는 ‘도쿄에서 조직돼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활동한 내선융화·친일 단체’로 요약돼 있다.
사전에는 국내에는 낯선 인물과 단체들이 등장한다. 색인에 담긴 인명은 5,400여명에 달한다. 유명인사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일본에서만 활동한 인물들이다. 이를 테면 도쿄조선노동조합 다마가와 지부장은 박남석이었다. 김광제는 선전부, 박두연은 서무부에서 활동했다. 노조가 8시간 노동제, 최저임금법 획득을 요구한 이듬해 서남지부가 개최한 정기대회가 경찰에 의해서 해산 당했을 때 노래를 부르며 시위하다가 잡혀간 사람은 한중호 외 9명이었다. 이처럼 기록 곳곳에서 재일조선인들이 품었던 고민과 대응, 삶의 방식이 드러난다.
이에 대해서 이 연구실장은 “이 사전은 삶의 원형을 보여준다. 제1세대 재일조선인들이 살았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연구실장은 재일조선인들이 결성한 노동 단체를 대표적인 사례로 꼽았다. 그는 “1945년 해방 당시에 재일조선인이 200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핵심은 조선인 노동단체는 일본 전국에 존재했다는 것”이라면서 “조선인들은 땅이 없으니까 농민 단체를 만들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노동 단체는 전국에 다 있었다”고 설명했다.
차가인 조합도 재일조선인의 현실을 잘 드러내는 단체다. 이 연구실장은 “‘차가’는 집을 빌리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함께 살기를 거부하니까 조선인들끼리 둑 같은 곳에 모여 살았다”면서 “주거가 열악하니까 조선인들이 차가인 조합을 만들어서 지방정부 등에 요구한다. 돈은 우리가 모을 테니까 허가만 해주라는 것. 생존을 위한 활동이었다”고 설명했다.
사전에 등재된 단체 가운데 설립 시기가 가장 빠른 것은 1895년 5월 설립된 대조선인일본유학생친목회다. 도쿄에서 관비 유학생을 중심으로 결성된 최초의 일본 유학생 친목 단체였다. 사전은 광복을 맞이한 1945년까지 설립됐던 단체를 다뤘다. 근거 자료는 대부분 당대에 일본에서 제작된 자료들이다.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에서 내놓은 자료집을 비롯해 민간에서 만들어진 월보나 잡지, 신문도 중요한 자료로 활용됐다.
집필에는 일본의 연구자 29명, 한국의 연구자 9명과 민문연 편찬팀이 참여했다. 이 연구실장은 이번 사전 제작에는 한국과 일본의 시민이 연대해 일본 극우가 벌이는 역사왜곡을 바로잡자는 의미가 담겼다고 설명했다. 일본 극우세력의 역사 왜곡에 제동을 걸려는 움직임이 일본 시민들 사이에서도 나타났다는 이야기다. 이 연구실장은 “2012년부터 원고를 집필하기 시작했는데 모든 연구자들이 원고료를 전혀 받지 않았다. 한일 시민 연대 차원에서 시작한 일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연구실장은 “일본 집필자들은 강단에 있는 교수님도 있고 지역별 연구자들도 있다. 우리말로는 재야 사학자들이다. 일반 시민으로서 역사 문제에 관심이 있어서 전문가가 된 분들도 각 지역의 조사를 담당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서 “단체마다 일대일로 필자가 병기돼 있다. 객관성을 필자가 책임지는 것이다. 물론 자료 확인 등 마무리는 연구소와 함께했다”고 덧붙였다. 권시용, 노기 카오리, 박광종, 이명숙, 조한성 등 민문연 편찬팀도 전체 항목의 35%를 작성해 힘을 더했다.
일본어로 작성된 원고를 번역하고 다듬는 일은 어려운 작업이었다. 표현이나 사실 관계에 대해서 의문이 생기면 이를 다시 일본어로 번역해 일본 집필자들과 상의해야 했다. 무엇보다 한일 집필자들의 문화적 차이를 조정하고 글에서 통합하는 작업이 큰 과제였다. 이를 테면 상애회 등 일부 단체의 한 줄 요약에는 ‘내선융화 단체’라는 일본식 표현과 함께 ‘친일 단체’가 병기돼 있다.
이 연구실장은 한국 연구자들은 상애회가 친목 단체에서 친일 단체로 변모하는 데 주목했지만 “일본 집필자들은 복잡한 측면을 봤다”면서 “일본에서 차별을 극복하고 살려면 법과 풍속에 동화해야 하고 그것을 ‘융화’라고 한다. 반면 한국에서는 (한반도 밖에서 온) 일본의 지배를 받아서 융화되는 것이기 때문에 (집필자들이) 용어에 거부감이 있었다. 정서뿐만 아니라 역사에 대한 해석도 조금씩 차이가 있기 때문에 하나로 표현하는 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고 설명했다.
사전에 항목으로 작성된 재일조선인 단체는 일부에 불과하다. 일제 당국이 당대에 조사한 재일조선인 단체만 2,700여개에 달한다. 이 목록은 사전에 부록으로 담겼다. 이 연구실장은 지역별로 확인된 자료의 질과 양에 차이가 있다면서 “오키나와는 자료가 없다. 일본 집필자들도 어려워했다. 오사카는 사전에 담긴 것보다 훨씬 많은 재일조선인 단체가 있을 것. 앞으로 새로운 자료가 나타난다면 재일조선인 단체 항목도 늘어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연구실장은 현재 일본에서 역사교과서에 담긴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 진행되고 있는데 재일조선인단체사전이 학술적으로 대응의 바탕이 될 수도 있다면서 이렇게 강조했다. “노동조합 항목을 보면 일본이 어떻게 조직적으로 조선인들을 관리했는지 잘 나온다. 도망가는 조선인 노동자들을 어떻게 재교육하고 정신 훈련을 시켰는지 다 나온다. 교과서에서 그런 것들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정부 차원에서 역사교과서 문제에 대응하지 못한다면 한일 시민들의 연대가 대응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