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군, 체르노빌서 맨손으로 방사능 물질 만져... 말렸는데도 무시"

입력
2022.04.09 17:07
시묘노프 체르노빌 원전 최고안전기술자
NYT와 인터뷰에서 "러시아, 하고싶은 건 다 했다"
오염 지역서 참호 파고, 피폭된 나무 땔감으로 쓰기도


우크라이나 북부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를 점령했던 러시아군이 방사능 물질 노출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경계심이 없이 마구잡이로 행동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맨손으로 방사성 물질을 집아 드는 등 주의가 결핍된 행동을 통해 작전을 수행한 러시아군이 심각한 수준의 방사선 피폭을 당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발레리 시묘노프 체르노빌 원전 최고안전기술자는 8일(현지시간)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 인터뷰에서 러시아군의 체르노빌 원전 점령 기간 우려스러웠던 순간들을 털어 놨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러시아의 한 화생방부대 병사는 체르노빌 원전의 폐기물 저장고에서 방사성 물질인 ‘코발트60’을 맨손으로 집어 들기도 했다. 코발트60은 미량으로도 다량의 방사능을 방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묘노프 최고안전기술자는 이 병사의 방사능 피폭량은 단 몇 초 만에 가이거 계수기의 측정 범위를 넘어설 정도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러시아는 하고 싶은 짓은 다 했다. 위험하다고 말렸는데도 무시했다”고 말했다. 다만 문제의 군인이 어떻게 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러시아군이 방사성 물질 노출 우려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른바 ‘붉은 숲’에 참호를 파고 주둔했다는 의혹도 점차 사실로 드러나는 모습이다. NYT는 러시아군이 불도저와 탱크 등을 이용, 체르노빌 원전 인근에 참호를 설치한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됐다고 전했다. NYT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이 지역에 단단한 참호와 벙커를 구축하고, 인근 나무를 태워 연료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붉은 숲은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에 노출된 후 붉은색으로 고사한 소나무들이 많아 이름이붙여진 지역으로 토양에 방사성 물질이 다량 섞여 전세계에서 방사선 오염도가 가장 극심한 지역으로 꼽힌다. 체르노빌 사고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이 지역의 방사능 오염도가 낮아지기는 했지만, 일부 지역은 오염도가 일반 자연의 수천 배에 달한다고 한다. NYT는 “이런 곳에서 활동한 군인은 1년 치 방사선량에 한꺼번에 피폭될 수 있다”고 전했다. 또 방사성 물질에 피폭된 나무를 연료로 사용하는 경우 연기 등을 통해 피폭량이 증가할 수도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시묘노프 최고안전기술자는 NYT에 가장 우려스러웠던 상황은 3월 중순 1986년 핵발전소 붕괴 당시 유출된 방사능 물질보다 몇 배 강한 방사능 물질인 사용후 핵연료를 저장한 냉각수조에 전기가 차단됐을 때라고 말했다. 당시 우크라이나 기술자들은 냉각수조의 물이 끓어올라 수증기가 공기중에 배출되면 화재가 발생할 것을 우려했다고 그는 전했다.

우크라이나 원전 당국자가 체르노빌 주둔 러시아군의 피폭을 경고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체르노빌 원전 인근을 관리하는 예브헨 크라마렌코 우크라이나 국가배제구역 관리국 책임자는 앞서 3일 브리핑에서 “(체르노빌 발전소 인근) 금지 구역을 점령했다가 벨라루스로 철수한 러시아 군인이 상당한 양의 피폭을 받았을 수 있다”고 말했다. 크라마렌코는 "체르노빌 참사 이후 표토를 오염시켰던 방사성 핵종이 이제 지하 30~40㎝ 위치로 내려앉았는데 러시아군이 참호를 파면서 토양의 자연 보호층을 교란했다"고 설명했다. 현지 매체는 일부 병사에게 급성방사선증후군이 나타나자 러시아군이 혼란에 빠졌고, 이후 피폭에 대한 두려움으로 부대 내에 폭동이 일어날 뻔 했다고도 전한 바 있다.

김진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