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7월 1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 800명이 넘는 남성들이 도열했다. 그들 앞에는 야트막한 단상이 있었고, 단상의 왼쪽엔 공무원, 오른쪽엔 경찰이 앉았다. 서울시장 윤태일은 단상 위에 올라 격려사를 시작했다. "자랑스런 일꾼으로서 국가사회에 이바지하려고 일어선 제군들의 앞날을 축하한다"며, 이들을 범죄로부터 보호하겠다고 했다. 이어 그 자리에 모인 남성 중 한 명이 단상 앞에 나가 답했다. "폐품을 재생해서 산업경제에 이바지하는 일꾼으로서 사회의 밑바닥에서 푸대접받았던 과거를 청산하고 훌륭한 직업인이 되겠다"고 말이다.
단상 앞에 도열한 남성들, 이들은 넝마주이였다. 그리고 '폐품수집인 취업식'으로 명명된 이날 행사는 넝마주이들의 공식취업 선서식이었다.
이날 행사는 5·16 군사정변 당시 군부가 내건 혁명공약의 일환이었다. 넝마주이들은 이제 경찰국에 자신의 신상을 등록해야 했다.
넝마주이들의 생존 방식은 전에 비해 달라지게 됐다. 취업선서식이 끝나자마자 서울시 경찰국은 부랑아 일제단속을 펼쳤고, 넝마주이는 취업선서식에 참여했던 취업등록자와 그렇지 않은 미등록자로 나뉘었다. 미등록 넝마주이는 단속을 피해 숨어야 했고, 등록 넝마주이의 고발도 피해야 했다.
단속에 걸린 미등록 넝마주이들은 도로공사나 산지개간, 매립사업 등 노역에 강제로 투입됐다. 강제노동에 동원하기 어려운 아이들은 지금의 소년원인 감화원이나 아동보호소에 수용됐다. 넝마주이들은 등록 여부에 따라 운명이 바뀌었고, 노동력에 따라 행선지가 결정됐다.
어쩌다 넝마주이들은 이렇게 '정비'와 '단속'과 '격리'의 대상이 된 것일까.
넝마란 낡고 해어져서 입지 못하게 된 의류나 침구류를 말한다. 이런 넝마를 줍는 건 지저분할지언정 나쁜 일이 아니다. 넝마주이의 일은 넝마나 유리 같은 폐품을 주워 고물상이나 공장에 가져다 파는 단순한 일이다. 군사정변 세력이 넝마주이들에게 ‘취업선서'를 시킨 이유도 이 일이 나빠서는 아니었다.
문제는 그들이 부랑아였기 때문이다. 넝마를 줍는 이들 대다수가 '거리에 흩어진 악의 꽃들'이라 불렸고, 범죄를 저지를 우려가 크다고 여겨졌다. 사회는 그들을 일정 거주지와 직업 없이 거리를 배회하며 범죄나 사회문제를 야기할 존재로 여겼다.
그들은 어린 부랑아였다. 작게는 6세, 많게는 24세 정도였는데, 사회변동에 휘말려 불안정한 처지가 된 이들이었다. 가장 큰 변동요인은 무엇보다도 한국전쟁이었다. 전쟁을 통해 보호자가 사망했거나 보호자와 이별한 채 혼자 남아 자란 아이들이었다. 또 가난 때문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혼자 남거나, 농촌서 상경한 후 생활고를 겪는 아이도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고아원에 수용됐고, 일부는 해외로 입양됐다. 그러나 고아원 중엔 운영자가 부패하거나 재정적으로 불안정한 고아원이 많았고, 결국 아이들은 고아원을 떠나 부랑아가 되고 말았다.
부랑아들은 냉담한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리를 이뤘다. 그들은 연령대에 따라 각기 다른 일을 했다. 망태와 꼬챙이를 들고 다닐 만한 힘이 있는 큰 아이들은 넝마와 폐품을 주웠고, 그만한 힘이 없는 아이들은 나무로 된 구두통을 들고 다니며 구두를 닦았다. 돈 계산을 할 줄 아는 아이들은 껌이나 신문을 팔았고, 이보다도 작은 아이들은 구걸을 도맡았다. 이들은 범죄에 휘말리기도 했다. 배고픔을 못 이겨 소매치기나 절도를 저질렀고, 구역을 두고 폭력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렇듯 부랑아는 전쟁 후 사회의 곤궁함과 어려움의 소산이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때였고, 정치적 혼란과 재정부족으로 인해 국가는 이들을 돌볼 능력이 없었다. 국가는 아이들의 생존에 직결되는 보육시설의 확충이나 재정안정보다 아이들이 부랑한다는 이유로 그냥 사회에서 배제하는 방식을 택했다. 구조적이며 불가피했던 그들의 불안정성을 완화하겠다는 고민보다, ‘우범성’을 근거로 단속했고, 강제노역과 강제수용의 대상으로 삼았다.
넝마주이들은 낙인찍힌 존재로 살아야 했다. 넝마주이를 두고 사회는 우범자라는 낙인을 찍었고, 그들은 사회에서 돈이 들지 않는 노동력이나 단속해야 할 위험한 존재로 여겨졌다. 예컨대 1961년에 ‘취업’한 넝마주이들은 이듬해 '근로재건대'로 재편됐고, 이들 가운데 일부는 김춘삼이 만든 '대한자활개척단'이나 ‘서산개척단’으로 잘 알려진 '대한청소년개척단'이라는 조직을 통해 각지의 개척사업에 보내졌다. 개척단으로서의 삶은 열악했고, 비인간적이었다. 근로재건대나 개척단 바깥에 위치한 넝마주이들은 단속을 피하며 폐품을 주웠고, 일부는 고물상 일을 시작하기도 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심해진 부랑인 단속으로 인해 미등록 넝마주이의 수가 줄기 시작했다. 이들의 집단거주지는 무허가건축물로 분류돼, 불법 점유에 대한 벌금이 부과되기도 했다. 그들이 생존할 수 있는 터전은 점점 좁아졌다.
동시에 온갖 쓰레기가 난지도 매립지로 모여들자 미등록 넝마주이들은 대거 난지도로 이주했다. 등록된 넝마주이들도 재건대의 일이 희미해지자 1980년대 중반에 난지도나 소수의 집단주거지로 이주했다. 이후 1993년 난지도매립지의 운영이 종료됐고, 넝마주이는 자취를 감췄다.
넝마주이는 한국전쟁과 빈곤이 만들었고, 국가가 방치한 부랑아들이 살아남기 위해 택한 삶의 방식이었다. 넝마를 줍는 일이란, 산업화 사회에서 생산할 것이 하나도 없는 사정의 사람들이 남이 쓰고 버린 것을 산업 영역으로 돌려보내는 일이다.
과거의 넝마주이, 즉 부랑아로 구성된 넝마주이는 이제 없다. 새로운 이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자신이 넝마를 주우리란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이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그들은 바로 ‘가난한 노인’이다. 이들은 과거의 넝마주이와 마찬가지로 거리를 거닐며 폐품을 줍고, 고물상에 되판다. 다만 과거와 같은 조직은 따로 없고, 국가의 단속도 따로 없다.
그렇다면 더 나은 상황일까? 아니다. 여전히 이 일을 하는 이들에 대한 보호는 없다. 각자도생이란 말처럼, 그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늙어가는 몸의 고통을 참으며 외롭게 걷고 줍고 파는 일을 할 뿐이다. 2022년, 병들고 늙은 넝마주이들이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