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살 부활절 때였다. 아이들이 교회 단상에 올라 춤추고 노래하며 그날을 축하했다. 예배당을 가득 메운 사람들 앞에서 필자는 피아노 앞에 앉아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주했다. 작은 손으로 조음해낸 선율이 예배당의 소음을 잠식하던 그때를 아직 기억한다.
어느 날 여러 유리컵에 물을 부어 놓고는 컵을 튕겨 동요를 연주하는 ‘오빠’를 보고, 아버지는 무슨 천재라도 본 양 피아노를 집에 들였다. 오빠 ‘덕분에’ 피아노 의자가 비는 날이면 피아노 연습은 필자의 몫이었다. 아버지는 연습을 조금이라도 게을리하면 불호령을 내렸다. 다리가 바닥에 닿지 않아 발판에 발을 올려놓고 피아노를 쳐야 했을 정도로 어린 다섯 살배기 베토벤을 혹독하게 연습시켰던 그의 아버지처럼.
물론 베토벤과 필자를 비교하는 건 가당찮다. 음악의 상대성이론이랄까, 다만 피아노 건반을 누를 때면 연습이 지겨웠던 나의 시간은 더디게 갔다. 달팽이 걸음 같던 시간이 흘러 바이엘을 떼고 체르니를 칠 무렵 마침내 ‘엘리제’를 만났고, 그날의 예배당을 서툴지만 아름다운 A 마이너 선율로 채울 수 있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그는 자신이 한때 사랑했던 여인 테레제 말파티를 위해 이 곡을 작곡했다고 한다. 곡 제목의 여인이 테레제가 아니라 엘리제인 것은, 그가 워낙 악필이라 오독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베토벤은 하이든, 모차르트와 함께 고전파를 대표하는 천재 음악가로, 귀가 먼 상태에서도 위대한 곡을 써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한때는 유서(Heiligenstädter Testament)까지 썼을 정도로 절망에 빠졌지만 그 가운데서도 수많은 명곡을 남겼다. 분명 악성(樂聖)임에 틀림없다.
최근 도서출판 길에서 출판한 얀 카이에르스(Jan Caeyers)가 쓴 ‘베토벤’을 읽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베토벤도 필자처럼 와인을 좋아했단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가 하이든이나 살리에리와 같은 선배 음악가들과는 달리 궁정 악단에 소속되지 않고, 프리에이전트로 활동했다는 점이다. 음악회를 직접 기획해 열었고, 악보를 적극 출판해 저작권 수입을 올렸다. 같은 곡을 여러 출판사와 계약해 저작권 체계를 문란시키기도 하면서 말이다. 다른 음악가들이 ‘매절’(저작권료를 일시불로 받고 저작권과 출판권을 출판사에 파는 것)로 악보를 출판한 반면, 그는 곡을 주문한 귀족에게 일정 기간 동안 독점권을 주었다. 그 기간이 지나면 악보의 출판권을 베토벤이 가져온다는 조건으로. ‘사인본 악보’를 팔기도 했고 여러 나라에 수출하기도 했다니, 출판인인 필자로선 여러 생각이 든다.
베토벤과 이름이 같은 그의 할아버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독일 본에서 쾰른 대주교이자 선제후의 궁정 악단에서 가수 겸 악장으로 일했다. 그는 근면하고 성실하며 책임감이 강했다. 부업으로 네덜란드인들을 상대로 와인을 팔아 생계를 꾸렸다. 그런데 그의 아내(베토벤의 할머니)가 지하실에 쌓아놓은 와인을 한두 잔 마시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와인 없이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졌다. 결국 그녀는 수도원(정신병원)에 감금되고 말았다.
베토벤의 아버지 장(요한 판 베토벤)은 그의 아버지가 와인을 팔아 모은 재산을 유산으로 받았다. 그는 아들에게서 모차르트 못지않은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고는 음악 교육을 혹독하게 시켰다. 아들의 재능을 이용해 큰돈을 벌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덟 살 베토벤을 신동으로 보이기 위해 여섯 살이라 속이고 연주회를 열기도 했단다.
사실 장도 그의 아버지처럼 궁정 악단에서 가수로 일했다. 와인을 많이 마셔 주사를 부리기도 했지만 그는 가장으로서 나름 충실했다. 하지만 아내 마리아 막달레나(베토벤의 어머니)에 이어 딸까지 세상을 뜨자 완전히 좌절하고 말았다. 알코올 중독으로 가수의 생명인 목소리를 잃더니,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다 체포될 위기에 처하기도 여러 차례였다. 그럴 때마다 베토벤이 아버지를 지켜야 했다.
베토벤의 빈 유학을 도운 쾰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프란시스 대주교는 베토벤에게 아버지 연금의 반을 받도록 조치했다. 베토벤은 궁정 악단에서 일하는 한편 피아노 레슨과 연주로 돈을 벌었다. 불행으로 치닫는 가족의 삶을 지켜내기 위해 그는 17세부터 온전히 가장 노릇을 해야 했다. 하지만 이는 또 다른 불행으로 이어졌다. 자신이 받지 못한 사랑을 동생들에게 베풀고 싶었을까. 베토벤은 동생들의 결혼 문제에까지 지나치게 간섭해 그들과 불화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녹록지 않았다. 신분을 뛰어넘는 우정을 나눈 후원자 리히노프스키 공작에게 피아노 소나타 ‘비창’을 헌정하기도 했지만, 공작이 내키지 않은 연주를 요청하자 과격하게 거부한 탓에 둘의 관계는 끝났다.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운명’의 장난인지 몰라도 그에게 허락된 건 사랑뿐 결혼은 그가 발 디딘 지상의 것이 아니었다.
청력이 약해지면서는 삶의 기반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연주를 너무 크게 하거나 괴성을 지르는 등 이상 행동을 해 빈과 그 외곽에 거주한 35년 동안 60여 차례나 거처를 옮겨야 했다(80여 차례라는 기록도 있다). 말년에는 갈수록 어렵고 깊이 있는 곡을 발표해 대중성과는 동떨어져 후배 음악가들에게 밀리기도 했다. 특히 조카의 친권을 두고 벌어진 재판에 남은 힘마저 소진한 탓에, 결국 베토벤은 우울증과 강박증이 도지면서 영육의 고통에 유폐됐다.
베토벤은 커피와 와인을 매일 마셨다고 한다. 아마도 그에게 두 음료는 영감의 원천이자 고통 완화제였을 것이다. 커피 한 잔에 원두 60알이 그의 취향이었다. 와인도 매일 한 병 이상을 마셨다.
베토벤이 처음부터 와인을 많이 마셨던 것은 아니다. 삶에 짙은 그늘이 지자 습관적으로 와인을 마셨다. 물론 그가 음악 교육을 받은 데에는 할아버지 재산의 기반인 와인이 한몫했거니와, 그에게 음악적 영감을 주고 음악성을 꽃피게 한 것 또한 어쩌면 와인이었으니, 애초에 와인은 베토벤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불멸의 술’인 셈이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평생 할아버지를 존경해 초상화를 간직했다고 한다.
베토벤이 세상을 뜬 후 부검을 진행했다. 간이 심하게 손상되고 축소돼 있었다고 한다. 보존돼 있던 그의 머리카락도 분석했다. 납 성분이 과다하게 검출되었다고 한다.
베토벤이 살던 18~19세기에는 와인에 단맛을 내기 위해 아세트산납을 첨가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는 말년에 이르러 잦은 토사곽란과 복수(腹水) 탓에 시술을 받았는데, 복수를 뺀 뒤에는 시술한 자리에 납 반창고를 붙였다고 한다. 가래를 삭이기 위해 치료제로 납염도 사용했다. 이 정도면 외려 납 성분이 검출 안 되는 게 이상할 지경이다.
아무튼 베토벤은 고통의 나날을 살아 냈다. 통증을 진정시키는 한 방법으로 펀치를 처방한 의사도 있었다. 그 의사는 베토벤이 와인에 집착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알코올 도수가 낮고 향긋한 화이트 와인도 펀치와 효능이 같다고 귀띔했다. 와인을 계속 마실 수 있다는 사실에 그는 크게 안도했다고 한다.
그는 고향인 본(22년)보다 빈(35년)에 더 오래 거주했기에 주로 오스트리아 와인을 마셨다. 지금도 빈 외곽에는 베토벤이 기거하며 합창 교향곡(9번)의 일부를 작곡했다고 알려진 호이리거(선술집)가 남아 있다. 와인을 처방받은 뒤로는 추천받은 와인을 마셨다. 바하우 지역의 굼폴즈키르헨, 빈 외곽의 그리칭, 동생 요한이 추천한 그나이젠도르프에서 생산된 와인 등이다. 나중에는 와인을 가리지 않았을 뿐더러 너무 많이 마신 탓에 부작용이 만만치 않았다.
수많은 걸작을 작곡하는 가운데 베토벤은 줄곧 고통과 싸워야 했다. 하지만 그는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 순간 고향의 와인을 마시고 싶었을까, 아니면 독일 와인의 약효가 더 좋다고 생각했을까. 베토벤은 그의 작품을 출판한 마인츠의 쇼트(Shott) 출판사에 편지를 보냈다. “라인과 모젤의 와인을 보내주시오.”
불행하게도 와인은 그의 죽음이 임박해서야 도착했다. 1806년산 뤼데스하임 와인이었다. 베토벤의 비서 쉰들러가 와인병 마개를 열었다. 숟가락에 와인을 따른 그는 이미 의식이 혼미한 베토벤의 입에 와인을 흘려 넣었지만 와인은 베토벤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뤼데스하임(Rüdesheim am Rhein)은 로마 시대부터 와인을 생산해온 명산지다. 한때 베토벤과 교류했던 괴테가 ‘라인강의 진주’라고 극찬한 곳이다. 괴테는 이곳의 와인을 마시고는 “와인이 입술을 통해 혀끝으로 전달되는 순간은 ‘사랑하는 여인과의 첫 키스’만큼이나 감미로웠으며, 와인을 마시기 직전의 감정은 ‘사모하는 사람을 만나기 직전의 설렘’과 비슷하다”라는 글을 남겼다.
책에 실린 정보로 유추해보자면, 도수가 낮고 향긋한 1806년산 뤼데스하임은 ‘리슬링’ 품종으로 빚은 ‘카비네트’로 보인다. 카비네트는 충분히 잘 익은 포도를 수확해 빚어 미네랄, 감귤류, 복숭아, 살구 등의 향에 꽃향과 페트롤, 꿀향이 어우러진 새콤달콤한 와인이다. 당분을 완전히 발효시키지 않고 남기기 때문에(완전히 발효시킨 드라이한 스타일도 있다), 알코올 도수가 비교적 낮다.
오늘날 독일에는 카비네트보다 높은 등급의 와인도 있지만, 1806년에는 카비네트가 독일 와인 가운데 가장 고급이었다. 귀한 와인이라 특별히 ‘카비넷(캐비닛)’이라 칭한 셀러에 보관해두고 마셨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영국의 ‘베리브러더스 앤 러드’의 19세기 가격표에 따르면, 뤼데스하임에서 생산된 카비네트는 프랑스 부르고뉴와 보르도의 최고급 와인보다 비쌌다.
세상을 뜨기 전 베토벤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유감이군. 늦었어. 너무 늦었어.” 그가 특별히 부탁한 와인이 늦게 도착했음을 두고 한 말이다. 그렇게 베토벤은 세상을 떠났다. 비록 베토벤의 혀를 적신 와인은 몇 방울밖에 안 되었지만, 와인을 좋아하는 이들은 안다. 와인의 향을 느끼기에는, 오랜 기다림을 끝내기에는, 마지막 고통을 달래기에는 충분했음을.
나의 에로이카. 당케, 루드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