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떡하지? 주인아줌마가 집 비워달라는데? 그것도 한 달 내에.
- 응? 왜 갑자기?
- 직접 들어와 살아야 할 일이 생겼대.
우리로서는 날벼락 같은 통고였지만 불평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싼값에 전세를 내주고도 지난 10년간 단 한 차례도 전세비를 올려달라는 요구가 없던 집주인이 아니던가. 덕분에 코 흘리던 아이들도 어느새 취직을 하고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다. 그쪽도 우리만큼이나 답답한 사정이 있는 모양이지, 뭐.
그보다 문제는 지난 10년간 주변 전세비가 세 배는 껑충 뛰었다는 사실이다. 이 집 전세비로는 이 정도 규모의 아파트는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렇다고 넉넉지 못한 살림에 어디서 갑자기 큰돈을 마련할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니, 더 큰 문제가 있다. 그간 불려놓은 세간이 적지 않은 탓에 너무 작은 집으로 이사할 수도 없지 않은가.
아내와 나는 곧바로 검색에 들어갔다. 아무래도 아파트는 어렵겠지? 빌라 중심으로 찾아봐. 30평대는 많이 좁을까? 더 찾아봐요. 조금 더 주더라도 40평대는 되어야 하지 않겠어? 애들도 다 컸는데. 이거 어때? 40평대라는데 신기하게 여기보다 싸네? 뭐가 문제가 있나? 집이 빈 지 오래라 당장 입주도 가능하대. 지금 더운밥 찬밥 가릴 때가 아냐. 일단 연락하고 가보자.
전세비가 주변 시세의 절반이다. 터무니없이 싼 데도 사람이 들지 않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지은 지 30년이 넘은 빌라, 여기저기 갈라지고 곰팡이도 장난이 아니다. 삐뚤빼뚤 구도로를 이용하는 산동네에 진입로 경사도 여간 급하지가 않았다. 겁 많은 아내로서는 출근할 때마다 오금이 저릴 법하다. 게다가 제일 가까운 마트나 편의점도 걸어서 경사길을 10분 이상 내려가야 나온단다.
아내는 자기가 돈을 엉뚱한 데 쓴 탓이라며 미안해한다. 그래 봐야 서울 양반들에 비하면 푼돈 수준이지만 사실 돈이 문제라면 내 탓이 더 크다. 몇십 년간 꾸준히 직장 생활을 해온 아내와 달리 나야 돈 못 벌기로 유명한 번역쟁이에 글쟁이가 아닌가. 그런데도 아내는 내 노후에 소일거리가 필요하다며 저 산골 맹지 땅을 구해주기까지 했다. 매주 하루를 비우며 10년째 텃밭 놀이를 즐기는 것도 다 그 덕분이다.
무엇보다, 좁지 않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책, 옷, 가구를 대폭 정리하고 선반 몇 개, 옷걸이 몇 개 조립해 달면 이런저런 수납공간을 대신하고도 얼추 우리 4식구 먹고 살 공간은 나오겠다. 그러고 보니, 좋은 점도 없지는 않다. 우선 산기슭 한적한 동네라 조용하고 공기도 맑다. 베란다 전망창이 동쪽으로 열려 있어 전망도 좋은 데다 무엇보다 매일 일출을 보며 잠에서 깨어날 수 있겠다. 아내는 2년 만 살다가 내가 좋아하는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 가자며 위로하지만 난 벌써부터 이 집이 마음에 든다. 바로 뒤에 산이 있고 여기저기 텃밭들이 보이고 아파트와 달리 사람들 사는 모습도 보인다.
내게는 커다란 저택도 집을 지을 땅도 그만한 돈도 없지만, 이 집이라면 천 개의 언덕 위로 솟아나는 아침을 보여드릴 수 있겠소. 나도 모르게 노래 한 소절을 흥얼거린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삶까지 휘둘릴 수는 없다. 난 아내를 위해 이 집에 일곱 송이 수선화 같은 행복을 담기로 결심한다. 집을 살(buy) 능력이 없다고 살(live) 능력까지 없는 건 아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