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가 달린다. 혼자 달려나가는 아이 곁으로는 각자 다른 이유로 열심히 달리는 사람들이 계속 지나간다. 하지만 아이는 일등을 하고 싶은 것도, 살을 빼고 싶은 것도, 친구를 빨리 만나고 싶은 것도, 누군가한테서 도망치는 것도 아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달리는 이 아이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낼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멈춘다.
정진호 작가의 '심장 소리'는 붉은색 하나만으로 절제해서 그려낸 그림과 담담한 서술이 돋보이는 그림책이지만, 아이가 열심히 달렸던 이유가 비로소 드러나는 장면에서는 독자들의 심장에서도 '쿵' 소리가 울릴 것만 같다. 아이는 지그시 눈을 감고 그리운 추억을 마주하고 난 뒤 씩씩하게 또 달려나가지만, 이 장면은 곱씹어볼수록 자꾸만 눈물이 차오른다.
그림책이 다루는 주제에는 이제 딱히 금기가 없다. 고통, 이별, 죽음 같은 주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그림책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그림책도 삶의 기쁨과 슬픔 전반을 충분히 다룰 수 있으며 어린이 독자들도 삶의 어두운 측면까지 편견 없이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존재임을 작가들도, 독자들도 진심으로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어린이에게 닥친 비극을 소재 중심적으로 다루어서 '고발' 혹은 '주의 환기'에 그치는 작품들도 없지는 않다. 어린이들에게 다른 삶을 경험하고 타인의 처지에 공감해볼 기회를 주는 것은 그림책과 어린이문학이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지만, 겉핥기식 재현, 섣부른 위로는 오히려 편견을 심어줄 수도 있다. 또, 정말로 그러한 고통을 경험했거나 겪고 있을 어린이들에게 위로가 될 만한 책일까 생각했을 때 차마 건네지 못할 것 같은 작품들도 가끔 만나게 된다.
'심장 소리'는 자그마한 아이가 감당하기 어려웠을 크나큰 상실에 관한 이야기지만 날 것의 감정이 격정적으로 드러난 대목이 한군데도 없다. 정진호 작가는 한 아이가 슬픔을 받아들이고 애도하는 최선의 방식을 찾아가는 과정을 놀랍도록 차분하게 그려냈다. 슬픔을 이토록 담백하게 그려낸 어린이문학 작품은 무척이나 귀하다. 이것은 어린이가 고통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얼마나 의연할 수 있는지, 자신에게 부여된 생명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를 작가가 잘 알고 존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을 때 가장 사무치는 것은 따스한 체온과 부드러운 손길을 더 이상 느낄 수 없는 것이다. 반려동물을 떠나 보낸 친구들도 사진이나 동영상을 아무리 들여다본들 보드라운 털의 감촉과 안아 올렸을 때의 작은 심장 소리를 다시는 느낄 수 없다며 눈물을 흘리곤 한다. '심장 소리'의 아이는 달리고 또 달려서 심장이 쿵쿵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자신에게 생명을 주었던 존재가 자기 몸을 통해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엄마를 잃은 아이의 심리를 정밀하게 그려낸 '무릎딱지'(2010·한울림어린이 발행)의 주인공도 엄마를 잊게 될까봐 온 힘을 다해 달린다. 심장이 터지기 직전까지 달려서 숨을 쉬는 게 아플 정도가 되면 엄마가 가슴 속에서 아주 세게 북을 치고 있는 느낌이 든다면서. 그러고 보니 '무릎딱지'도 온통 붉은색으로 그려져 있다. 심장에서 솟구치는 강렬한 생명력을 나타내는 동시에 온몸을 휘감는 슬픔을 표현하는데도 더없이 어울리는 색인가 보다.
죽음과 상실에 관한 그림책에 자꾸 눈길이 가는 건, 얼마 전에 아는 어린이가 갑작스레 상주가 된 너무 슬픈 장례식장에 다녀온 적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일 이후로 어렸을 적에 부모님과 사별했던 친구들을 찾아다니면서 피붙이가 아닌 어른으로서 내가 앞으로 무얼 해주면 좋겠는지 물어보고 다녔다. 친구들은 동정이나 연민의 감정을 거두고 예전과 똑같이 대해 줄 것, 슬픔을 적당히 모른 척 해줄 것을 당부했다. 어린 나이에 양육자의 부재를 받아들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그러니 위로나 격려의 말로 일으키려 하기보다는 스스로 애도할 시간을 충분히 주라고.
'심장 소리'에서 함께 달리는 인물들의 태도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이가 혼자 달리는데도 "뭐 하니?" "어디 가니?" 하고 말을 건다거나 "같이 갈까?" 하고 덥석 손을 잡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아이는 그 속에서 딱히 슬프거나 쓸쓸해 보이지 않았는데, 바로 이런 것이 친구들이 나에게 부탁했던 "예의 바른 무관심"이 아니었을까 싶다.
정진호 작가의 그림책들은 2차원의 평면에 그려져 있지만 3차원 공간에 입체로 구현된 듯한 효과를 내는데, '심장 소리' 또한 겉표지에 도드라진 촉감으로 후가공된 붉은색 선을 따라 책을 펼치면 내지와 뒤표지, 다시 앞표지로 서사가 순환되는 구조이다. 슬픔에 주저앉지 않고 이렇게 한 발 한 발 내딛고 있을 어린이들에게 조용히 건네주고 싶은 그림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