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86세대' 김영춘 "민주당의 조용한 단결이 대선서 독 됐다" [인터뷰]

입력
2022.04.0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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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쇄신, 길을 묻다]
④ 김영춘 전 해수부 장관
"부동산 문제가 최대 패인"
"국민의힘보다 절실하지 못했다"

※더불어민주당은 대선 패배로 집권 5년 만에 정권을 내주게 됐다.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10년마다 정권이 교체된 '10년 주기설'이 35년 만에 깨진 것이다. 2020년 4월 총선을 정점으로 '전국선거 4연승'을 거둔 거대 여당이 2년 만에 민심의 외면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민주당이 아니라 차기 정부의 '여소야대 국회'가 민생을 위해 운영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해답이다. 이에 대한 객관적인 진단을 릴레이 인터뷰 형식으로 들어본다.

"이제 민주주의, 통일, 기득권 타파 등 거대담론의 시대가 아니라 생활정치의 시대가 되었다. 나는 거기에 적합한 정치인인가 자문자답을 해봤다."

대표적 '86세대 정치인' 김영춘 전 해양수산부 장관이 지난달 21일 밝힌 정계 은퇴의 변이다. 86세대가 주도했던 한국 정치사의 한 단락이 마무리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라는 게 정치권의 대체적인 평가다.

김 전 장관은 민주당이 3·9 대선에서 패배한 것도 이러한 격변하는 정치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지난달 31일 한국일보 본사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정부와 민주당은 부동산 문제를 사회 정의 차원에서만 바라봤다"며 "지금보다 나은 집에 살고 싶다는 국민의 욕구를 이해하거나 해법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 최대 패인"이라고 했다.

민주당이 변화에 뒤처진 이유로 '조용한 단결'의 폐해를 꼽았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백가쟁명식 분열이 끝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이어졌다는 트라우마가 의원들의 소신 발언을 억눌러 왔고 빠르게 변한 민심과의 괴리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민주당은 중도층과 청년들의 상식, 그리고 이들의 이해관계를 잘 대변하면서 해법을 제시할 수 있는 실력을 키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은퇴 이유로 ‘생활정치 시대의 도래’를 꼽았다.

"내 정치 입문 동기가 민주주의와 통일, 군부정치 청산 등 거대담론이었다. 하지만 이제 거대담론에 호응해 표를 주는 유권자는 없다. 이번 대선의 '공정' 이슈도 개인의 기회와 이익이 부당하게 침해당하는 불공정에 대한 거부감에서 비롯한 생활정치 차원의 문제다. 새 시대에 걸맞은 사람이 정치하는 게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치환경 변화를 느낀 계기가 있다면.

"문재인 정부는 공공기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정권 초기 주요 과제로 삼았다. '양극화 해소'라는 거대담론 차원에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청년들은 '나에게 돌아올 수도 있는 미래 이익(정규직 일자리)을 왜 지금 우연히 그 자리에 있는 비정규직이 독점하도록 하느냐'며 공정성 문제로 이해했다. 현 정부는 정규직화 노력과 동시에 구직 청년들이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두는 정의와 공정의 접합점을 찾아야 했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대응은 적절했나.

"적절히 대응했으면 대선에서 졌을까. 득표 차는 적었지만 그럼에도 국민들께 부족하다고 평가받은 것이다."

부동산 문제가 최대 패인..."국민의힘보다 절실하지 못했다"

-3·9 대선의 패인을 짚어본다면.

"부동산 문제가 1번 패인이다. 정부와 민주당은 부동산 문제를 사회정의 차원, 거대담론 차원에서만 바라봤다. 국민의 욕망과 미래에 대한 불안 등 국민 정서에 대한 이해와 이에 대한 출구를 마련해야 했다. 그런데 세금 인상과 대출 규제 등 징벌적 규제에 주력했다. 나를 포함한 민주당이 국민들을 이해하고 대변하는 데 소홀히 했던 것이다. 국민의 욕망과 싸우는 정치세력은 질 수밖에 없다."

-또 다른 패배 요인은.

"국민의힘이 더 치열하고 절실했다. 이준석이라는 30대 원외 정치인을 대표로 뽑을 정도로 정권교체에 대한 절실함이 컸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와의 단일화도 절실함의 발로였다. 반면 민주당은 당내 강성 팬덤을 적절히 제어하는 데 실패했다. 상식을 대변하는 의원들을 이들 팬덤으로부터 보호하거나 외부 인사에 손을 내미는 노력도 부족했다."

-소신 발언이 적은 이유는 무엇인가.

"열린우리당 시절 의원들이 하고 싶은 말을 백가쟁명식으로 쏟아내면서 '108번뇌'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당이 분열됐다. '너무 많은 당내 민주주의가 당을 망쳤고 노무현 정부의 실패로 이어졌다'는 평가가 나왔다. 그 이후 이견을 드러내지 말자는 분위기가 생겼고, 내부 비판을 하는 정치인은 강성 지지층의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조용한 단결’이 이젠 민주당의 독(毒)이 됐다. 겉으론 안정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무기력하게 대세 집단에 끌려가는 것이다. 이에 많은 국민들은 '민주당에는 나를 대변해주는 정치인이 없다'는 느낌을 받는다. 민주당이 노 전 대통령 서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중도·청년층 요구 귀 기울이고 구체적 해법 제시해야"

-민주당이 쇄신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반독재와 민주주의, 남북통일이라는 정체성은 지키면서도 동시에 중도층과 젊은 세대가 요구하는 정치를 추구해야 한다. 중도층은 자신의 이해관계와 상식을 대변하는 정당에 투표한다. 그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고, 그에 대한 해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일부 의원들은 최우선 과제로 검찰·언론개혁을 꼽는다.

"문재인 대통령 임기 5년 동안 180 의석을 갖고도 못 한 일이라는 데서 현실성이 떨어진다. 검찰개혁은 필요하지만 일제강점기부터 100년 넘게 이어 온 검찰·사법부의 기득권을 한 번에 해체할 수 있다는 건 '순진한 당위론'에 불과하다. 검·경 수사권 조정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출범 등 기왕의 성과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언론에 문제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선진국들은 언론을 바로잡겠다며 법과 제도로 모든 것을 강제하려 하지 않는다. '표현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토대를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 구성원과 언론 종사자 다수가 지지를 보내는 개혁이라야 성공할 수 있다."

-윤 당선인과 국민의힘에도 조언을 한다면.

"국민을 위해 성공하는 대통령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 그러려면 과반의 정권심판 여론보다 적은 득표를 한 의미를 잘 새겨야 한다. 국민 지지를 잃은 권력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윤 당선인은 벌써부터 국민과 야당, 현직 대통령과 소통이 굉장히 일방적이라는 느낌이 드는데, 인사부터 소통 노력을 보여달라."


"86세대, 을지로위원회 활동 등 쇄신 노력했지만..."

-정계 은퇴 선언을 두고 ’86세대 용퇴의 신호탄’이라는 평가가 있었다.

"86세대에 대한 비판은 일리가 있다. 86세대가 상징한 거대담론의 시대가 갔고, 우리 세대도 바뀐 정치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하지만 세대 전체를 다 물러나라고 하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우리 세대가 책임질 부분이 있다면 나의 은퇴와, 송영길·우상호 의원의 총선 불출마 선언으로 정리되면 좋겠다."

-2013년 기고에서 "86 정치인들이 정치적 권력 교체와 추상적 정의에만 몰두한 것 같다"고 비판했다.

"이런 비판을 수용해 86세대는 쇄신 노력을 했다. 사회적 약자의 구체적 삶의 어려움을 해소해주는 ‘을지로위원회’ 활동 등이었다. 2016년 총선 이후 2018년 지방선거까지 전국단위 선거에서 연승한 건 이러한 노력의 성과였다. 하지만 승리 이후 성과에 취해 청년층 등 달라진 유권자 지형을 포착하지 못했고 실사구시의 노력도 무뎌졌다."

-은퇴 후 계획은.

"정치만 세상을 바꾸는 건 아니다. 인문학 연구 기관인 ‘인본사회연구소’ 활동을 더 열심히 하려고 한다. 부울경 메가시티를 개별 지자체보다 더 큰 관점에서 조망하고 감독하는 ‘메가시티 포럼’이라는 시민단체 활동에 힘을 쏟을 것이다."

-다시 가슴이 뛰는 순간이 온다면 정계 복귀를 할 수도 있나.

"(잠시 고민 후) 그래도 안 할 것 같다. 35년간 정치를 했지만 세력을 만들고, 권력을 추구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의 일이 나에게는 잘 안 맞는다."

이성택 기자
홍인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