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는 음악과 비슷해요. 커피 콩을 재배하진 못하지만 어떤 품종의 원두로 얼마나 볶아서 어떤 크기의 입자로 분쇄하고 어떤 방식으로 추출해 한 잔의 커피를 완성할지 결정할 수 있죠. 작곡, 편곡하고 연주까지 해서 곡을 완성하는 것처럼요.”
‘새벽기차’ ‘풍선’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등으로 유명한 그룹 '다섯손가락'의 멤버 이두헌은 커피를 ‘연주’하는 기타리스트다. 음악가로서 곡을 쓰고 연주하며 경희대, 중앙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지만 20년 가까이 커피를 탐구해 온 연구가이기도 하다. 2년 전 경기 용인에 카페 겸 복합문화공간 ‘책가옥'을 열어 외부 일정이 없을 땐 매일 손수 커피를 내리고 있다. 성당을 연상시키는 외관에 북카페 같기도 하고 소규모 공연장 같기도 한 공간. 가수 이승환과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장유진, 첼리스트 한재민, 색소포니스트 손성제 등이 공연했다.
지난달 22일 이곳에서 만난 이두헌은 “음악과 책, 커피는 내게 호흡 같은 것”이라면서 “호흡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면서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한데 음악과 책, 커피가 내게 그런 존재”라고 말했다. 책가옥이라는 공간 자체가 이두헌의 분신인 셈이다.
7, 8년 전 싱글 ‘두 개의 시계’ ‘오래된 사진기’를 내놓고 오랜 기간 신곡을 내지 않았던 그는 지난 1월 가수 최성수를 보컬로 내세운 ‘그대와 함께 걷다 보니’에 이어 지난달 ‘커피를 부르는 오후 4시’를 잇달아 발표했다.
“제가 쓰는 핸드로스터기 제조사인 후지로얄 일본 대표가 여기를 찾은 적이 있어요. 그때 제게 ‘커피에 관계된 노래를 하나 쓰면 재밌을 것 같다’고 하기에 '언젠가 커피가 주제가 되는 곡을 쓰겠다'고 했죠. 커피를 만드는 사람이 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대로 녹아들어 나온 곡 같아요.”
이두헌이 커피에 빠지게 된 건 세렌디피티(우연히 얻게 된 행운이나 뜻밖의 발견)에 가깝다. 17, 18년 전쯤 일본 도쿄를 여행하던 중 우연히 커피전문점에 들어갔는데 커피 명인 다이보 가쓰지가 운영하는 ‘다이보’(2013년 폐점)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골 커피숍이자 블루보틀 창업자가 “커피를 변화시키는 마법과도 같은 시간을 경험했다”고 극찬한 곳이다.
“오래전 어머니가 서울 대학가에서 카페를 여러 군데 운영하셨는데 그때는 커피에 별 관심이 없었고 커피가 맛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도쿄 여행할 당시도 커피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죠. 그런데 다이보에서 커피를 마시고 충격을 받았어요. 커피를 마시자마자 인생이 바뀌는 느낌, ‘이건 뭐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죠. 커피의 질감과 농도가 미학적으로 완전히 달랐어요.”
다이보를 나와 커피용품 전문점으로 달려간 그는 닥치는 대로 각종 기계와 도구를 사서 커피 공부에 들어갔다. 국내에 들어온 거의 모든 품종의 원두를 사서 온갖 방법으로 커피 레시피를 연구했다. 다이보 선생이 쓰는 핸드로스터기를 복각한 제품을 구해 로스팅부터 추출까지 최상의 맛을 찾아 셀 수 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커피가 너무 어렵다"고 말한다.
커피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음악 활동을 소홀히 했던 건 아니다. 지금도 “남들에게 예측이 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매일 기타를 연습하고 공부하며 종종 무대에 선다. 조만간 신곡 두 곡도 내놓을 계획이다. 내년 다섯손가락 결성 40주년을 앞두고 30여 년 만에 새 앨범도 준비 중이다. 다섯손가락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3, 4집이 사실상 이두헌의 솔로 프로젝트였던 것을 감안하면 그룹으로선 무려 36년 만의 신보다. 원년 멤버인 임형순(보컬), 최태완(피아노, 키보드) 외에 이태윤(베이스), 장혁(드럼)이 함께하고 있다.
새 앨범은 보컬을 제외한 모든 녹음을 마친 상태. “음악이든 커피든 하면 할수록 어려워요. 기타를 40년 이상 연주했는데도 요즘이 가장 어려운 것 같아요. 커피를 만들면서 많이 반성했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안주하며 음악을 했는지 새삼 느꼈어요. 다섯손가락 앨범은 임형순씨가 ‘연주력이 떨어지지 않고 건강할 때 한번 해보자’고 제안해 시작하게 된 겁니다. 이태윤씨가 보컬을 맡은 ’커피를 부르는 오후 4시’를 비롯한 신곡 몇 곡과 예전 곡을 다시 연주한 걸 함께 담으려고요. 다들 연주력이 너무 좋아서 저는 숟가락만 얹어도 밥이 떠지는 수준입니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