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의 주요 역할 중 하나가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에 전화를 거는 일이다. 원유 가격이 낮으면 생산을 줄여달라고, 높으면 늘려달라고 요청한다. 2년 전 유가가 배럴당 15달러까지 떨어지자 트럼프 대통령은 실세인 모함메드 빈 살만 왕세자에게 부탁했다. 원유생산 비용이 40~50달러인 미국 기업들로선 버티기 어려웠다. 바이든 대통령은 반대로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고유가를 잡기 위해 전화기를 누르고 있다. 백악관은 부인하고 있으나, 빈 살만은 바이든 전화를 받지 않고 있다고 미 언론은 전했다.
□ 바이든은 결국 1일부터 하루 100만 배럴의 전략 비축유 방출을 결정했다. 이렇게 6개월 동안 풀리는 원유가 1억8,000만 배럴이다. 덕분에 국제유가는 급락했지만 러시아 제재에 따른 예상 부족분인 하루 300만 배럴을 상쇄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특히 공급 신축성이 높은 사우디가 움직이지 않으면 지금의 고유가는 잡기 힘들다. 그러나 OPEC플러스는 4월에는 기존 40만 배럴을, 5월에는 여기에 3만2,000배럴만 늘리기로 해 사실상 증산을 거부했다.
□ 우크라이나를 공격한 러시아를 무릎 꿇리려면 바이든은 에너지 전쟁의 승리가 필요하고 열쇠는 사우디가 쥔 형국이다. 문제는 바이든과 빈 살만 관계가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문제로 꼬여 있는 점이다. 바이든 정부는 4년 전 카슈끄지 살해에 빈 살만이 공모한 정보를 공개하고, 인권을 고리로 한 관계 재설정을 제시한 상태다. 바이든이 대화 상대로도 여기지 않자 빈 살만은 러시아와 군사협정을 맺고 중국에도 손을 내밀고 있다. 최근 미 언론 인터뷰에선 도덕 외교의 대가는 바이든이 책임져야 할 것이란 경고까지 날렸다.
□ 빈 살만에 외교적 사면을 하면 유가 안정을 견인할 수 있으나 바이든의 인권 외교는 사라지게 된다. 인권 외교는 대중국 봉쇄를 위한 연대의 기초이기도 하다. 하지만 고유가를 방치하면 경제는 물론 바이든의 기후 외교마저 흔들린다. 카슈끄지 문제로 냉랭하던 사우디에 현실 외교로 먼저 돌아선 곳은 오일머니가 필요한 터키다. 이 사건 연루자 26명을 궐석재판해온 터키 검찰은 사우디로의 사건 이관을 사법부에 전격 요청했다. 정의를 버리면 우정이 쌓이는 게 국제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