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시작' 그래도 꽃은 피고 싹은 튼다

입력
2022.04.0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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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산불이) 같은 지역은 피해 갔어요. 그때 3년 전인가... 어쩌면 그때 다 타 버려서, 탈 게 없어서 안 탄 건지도 모르지. 이쪽으로 바람이 불었으면 그 잿더미 속에서도 이렇게 힘들게 돋아난 푸른 잎들이 또 탔을 거래요."

식목일을 일주일 앞둔 지난달 30일, 2019년 대형 산불이 휩쓸었던 강원 강릉시 옥계면을 찾았습니다. 이곳에서 만난 주민 안문자(58)씨는 완연한 봄기운 속에 제법 푸르른 소나무 묘목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안씨에 따르면, 다행스럽게도 지난달 초 발생한 동해안 산불은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답니다.

동해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내비게이션 없이도 옥계면 위치를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파릇파릇한 신록 속에서, 엄청난 규모의 '민둥산'이 느닷없이 눈앞에 나타나면 그곳이 바로 옥계면이니까요. 산불이 할퀴고 간 지 3년, 피해복구는 어느 정도 진전이 있었을까요. 야산에 직접 올라가 보니, 산불 당시의 처참했던 흔적이 아직도 그대로입니다. 3년이라는 시간은 '치유'를 꿈꾸기엔 너무 짧았나 봅니다. 타다 만 소나무, 작은 동물의 뼛조각 같은 것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습니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던 중 소나무 묘목 군락이 나타났습니다. 주민 안씨가 가리킨 그곳입니다. 산불로 검게 그을린 대지 위에서 여리디 여린 소나무 묘목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드론을 띄워 공중에서 내려다봤습니다. 그을린 지면 위로 피어난 새싹같은 묘목이 이처럼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니 새까만 그루터기 옆에서 분홍색 철쭉도 피어났습니다. 느리지만 꿋꿋이, 희망이 싹을 틔우고 있었습니다.

최근 발생한 울진·삼척 등 동해안 산불은 국내 단일 산불로는 피해 규모가 가장 컸고, 지속 시간 또한 213시간으로 역대 가장 길었습니다. 조용우 부산환경교육센터 이사는 이 같은 대규모 산불의 원인을 "산불 예방과 진화 조직 간의 공조 부족, 산불을 고려하지 않은 산림 정책, 숲 관리 소홀로 인한 연료 축적 등 다양한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또, "산불의 예방과 진화, 복구를 하나의 세트처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산불 통합관리체계(IFM)’ 수립이 절실하다"고도 말했습니다.

동해안 지역엔 소나무나 잣나무 등 침엽수가 많이 자랍니다. 침엽수는 송진을 내뿜는데 여기에 기름기가 있어 불이 붙으면 좀처럼 꺼지지 않는 것은 물론, 화력이 유지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산림당국은 참나무 등 내화성이 강한 활엽수를 중간중간에 심는 방안을 강구해 왔으나, 침엽수가 비싸게 팔리는 탓에 산주들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한참 동안 말없이 소나무 묘목을 바라보던 안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즘 초대형 산불이 자주 나서 그런지 바람 기척만 나도 가슴이 철렁해. 시에서 사람들 뽑아서 산불 감시하라고 보내는 거 같은데 여기는 바람이 강해서 사람이 발견하면 이미 늦어. 그런 것보다는 기본적인 이야기지만... 모두 다 조심하는 수밖에 없어. 산불 조심!"

강릉시는 2019년 산불 진화 직후 4년생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었습니다. 검게 타버린 숲이 다시 숲다운 숲으로 살아나려면 최소 40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치유의 여정'이 이제 막 시작된 작고 여린 숲, 대자연을 살리기 위한 인간의 정성이 더욱 절실한 때입니다.


서재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