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휴전협상에 청신호가 켜졌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일부 지역에서 군사활동을 대폭 줄이기로 했고, 우크라이나는 중립국 지위를 채택하는 대신 새로운 안보보장 체제 구성을 제안했다. 양국 정상이 조만간 만날 가능성까지 언급됐다. 꽉 막혔던 양측의 대화가 급물살을 타면서 한 달 넘게 이어진 전쟁에 돌파구가 마련될 거라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29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 등 외신을 종합하면, 알렉산드르 포민 러시아 국방차관은 이날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린 4시간의 마라톤 협상이 끝난 뒤 “키이우와 체르니히우에서 군사활동을 급격하게 줄이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는 즉각 실시된다”며 “상호 신뢰를 높이고 합의 및 서명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한 결정”이라고 덧붙였다. 이날 회담에 앞서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이 “이제 우크라이나에서 우리의 군사 작전 목표는 동부 돈바스 지역 해방 달성”이라고 밝힌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러시아 측 협상 단장인 블라디미르 메딘스키 대통령 보좌관 역시 회담 뒤 별도 기자회견에서 “협상이 건설적으로 진행됐다”며 만족감을 나타냈다. 그는 “우크라이나 측으로부터 잘 정리된 입장을 전달받았다”면서 “이를 푸틴 대통령에게 보고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새로운 안보 보장 시스템’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크라이나 측 대표단으로 참여한 미하일로 포돌랴크 대통령실 보좌관은 “안보가 보장된다면 중립국 지위를 채택하는 데 동의하겠다”며 안보 보장 주체로 이스라엘과 폴란드, 캐나다, 터키 등 국가를 언급했다. 또 “중립국 지위를 채택할 경우 우크라이나에 외국 군사 기지를 유치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우크라이나의 중립국화와, 자체 군대는 있지만 외국 군사기지가 없는 ‘비무장 국가’로의 전환은 그간 러시아가 요구해오던 사안이다. 이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언급한 셈이다.
우크라이나 측은 ‘새 시스템’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은 하지 않았다. 다만 우크라이나가 동부 돈바스와 2014년 러시아가 강제 병합한 남부 크림반도를 제외한 나머지 영토에 대한 안전 보장을 요구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이날 우크라이나는 크림반도를 러시아 영토로 인정해야 한다는 러시아 측의 요구에 대해 “향후 15년간 크림반도의 지위에 대해 협의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양측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정상회담 성사 가능성까지 꺼내들었다. 메딘스키 보좌관은 “두 대통령이 직접 회동할 수 있다고 보고 이를 위한 시간표 작성에 속도를 내기로 했다고”고 말했다. 회담은 양국간 조약이 준비되는 대로 가능할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불과 사흘 전까지만 해도 “만남은 오히려 역효과를 낼 것”이라며 회담 가능성을 일축했던 점을 감안하면 진전된 발언이다.
승자는 없고 피해만 커지던 상황에서 양측의 대화가 급진전을 보이자 평화 기대감은 확산하고 있다. 독일 공영방송 도이체벨레는 “회담이 건설적이라는 발언이 이어지면서 전쟁 종식을 향한 진전이 있을 수 있다는 희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말했다.
주요국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이날 양측의 성명이 나온 뒤 백악관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유럽 주요국 정상과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통화를 소집했다고 밝혔다. 통화에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마리오 드라기 이탈리아 총리,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참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