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영세중립국의 특징과 역사
요즘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인해 다시금 주목받는 개념이 하나 있다. 바로 ‘영세중립국(永世中立國)’이란 개념이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종전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 나토 가입을 포기하는 대신 우크라이나를 향후 영세중립국화하겠다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영세중립국은 특정 국가가 스스로를 영세중립국으로 선포한다고 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중립의 국제적 지위는 해당 중립국과 그 지위를 인정하는 관련 국가들 간의 합의나 또는 묵시적 합의에 의해 성립되는 상대적 지위이다. 따라서 특정 국가가 영세중립국이 되기 위해서는 국제법상 ‘중립’을 보장받아야 한다.
현재 국제적으로 영세중립국의 법적 지위를 갖고 있는 국가는 스위스, 오스트리아, 트루크메니스탄, 바티칸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들 국가들이 국제법상 영세중립국의 지위를 갖게 된 배경과 절차는 사뭇 다르다.
스위스는 1499년 독립 이후로 영세중립국을 지속적으로 표방해 왔다. 스위스는 지정학적으로 4~5개의 국가가 인접해 있으며, 그것도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 전부 강대국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위스는 자국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주변 국가의 분쟁에 휘말리기보다는 분쟁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스위스가 국제사회에서 영세중립국으로 인정받은 것은 이보다 훨씬 뒤인 1815년 빈 회의를 통해 승인받게 된다. 빈 회의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후 유럽의 질서를 바로잡고자 각 나라가 영토를 분할하기 위해 모인 회의이다.
이처럼 스위스는 역사적으로 15~16세기부터 영세중립국을 표방해 왔기 때문에 오늘날 영세중립국의 대명사처럼 여겨지고 있으며, 그뿐만 아니라 영세중립국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경제적 혜택도 독차지하다시피 하고 있다. 먼저 스위스는 제1, 2차 세계대전도 피할 수 있었으며, 냉전 시기에도 영세 중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영세중립국인 스위스가 취한 이득은 단순히 손실을 피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스위스는 현재 국제정치의 중심 무대 역할을 하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 국제적십자사(Red Cross), 국제보건기구(WHO), 국제노동기구(ILO)·세계지식재산기구(WIPO) 등 30여 개의 주요 국제기구가 있고, 250개에 달하는 국제 NGO 단체들이 스위스에 본사를 두고 있다. IOC(국제올림픽위원회), FIFA(국제축구연맹) 본부 역시 각각 로잔과 취리히에 있다.
하지만 스위스가 아무 대가 없이 이득만 취한 것은 아니다. 국제법상 영세중립국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중립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교전국을 지원하거나 교전국에 편의를 제공할 경우 중립을 인정한 국가들에 의해 해당 중립국의 국제적 지위는 소멸된다. 이 때문에 영세중립국을 표방해 온 스위스는 유럽의 강력한 군사동맹인 NATO 회원도 아니며, 유럽연합(EU)에도 가입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스위스는 UN 역시 한동안 가입하지 않다가 국민투표 결과에 따라 2002년이 되어서야 정회원 국가로 공식 가입한다.
스위스가 오래전부터 스스로를 영세중립국으로 표방하며 근 2세기 뒤에 이를 달성했다면, 오스트리아는 전혀 다른 경로를 거쳐 영세중립국이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강압에 의해 독일 나치당과 동맹을 수용한다. 이로 인해 2차 세계대전 패전국이 되었고, 그에 따라 1945년 7월 4일 모스크바 선언에 의해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네거티브 4개국이 오스트리아를 각각 분할 통치한다.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이러한 분할 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4개 국가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는 영세 중립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의 영세 중립 추진 과정은 스위스의 경우와 상당히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에 미국은 호의적이었다. 미국 입장에서는 오스트리아가 소련 쪽으로 넘어가지만 않는다면 중립국이 되어도 관계없었다. 결국 미국은 오스트리아를 마샬 플랜을 통해 적극 지원했다. 반면, 스탈린의 소련은 중립화를 못마땅해 했다. 원래 소련은 오스트리아를 공산화하기 위해 초기 임시 수상으로 당시 명망 있는 사회주의자 칼 레너(Karl Renner)를 추천하였다. 하지만 칼 레너는 기대와 달리 소련이 바라는 사회주의 국가 건설이 아니라 강력한 독자노선을 견지하였다. 레너는 임시정부를 구성할 때에도 공산당뿐만 아니라 사회당과 국민당 등 좌․우 세력을 고루 안배한 중도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스트리아는 소련의 반대로 인해 쉽게 영세중립국의 지위를 획득해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1953년 스탈린이 세상을 떠나고, 뒤이어 권력을 잡은 흐루쇼프 때 상황이 달라진다. 당시 흐루쇼프는 서방 국가와 소련이 상호 평화적 공존을 하길 희망했고, 그것이 서유럽과 동유럽의 중간쯤 위치한 오스트리아의 영세중립국을 허용하는 계기가 된다. 당시 세계 55개국이 오스트리아의 영세중립국을 승인한다.
우리에겐 잘 안 알려진 영세중립국이 하나 있다. 바로 ‘코스타리카’다. 중남미 남부 지역에 위치한 코스타리카는 여느 중남미 국가와는 다른 경로로 발달해 온 국가이다. 코스타리카는 1890년 중남미에서는 최초로 자유 선거를 실시한 후 1948년 독립국이 되었다.
코스타리카는 1948년 대통령 선거 결과로 정부와 군부가 대립하던 중 군부가 정권을 장악했으나, 6주간의 내전으로 국민 2000여 명이 사망한다. 당시 코스타리카는 군부 쿠데타를 제압한 뒤 또다시 군부 세력이 등장하는 일을 막기 위해 1949년 11월 평화헌법을 채택하고, 군대를 해산한다. 국방비 예산은 교육 예산으로 전용하여 국가 예산의 30%를 교육비로 사용한 바도 있다.
이후 코스타리카는 자신들의 이러한 전통을 유지함과 동시에 국가 안보를 보장받기 위해 1980년 유엔평화대학을 설립하였으며, 인근 국가와의 갈등이나 무력 대립을 피하기 위해 1983년 11월 17일 비무장 영세 중립 정책을 선언한다. 그리고 이러한 코스타리카의 선언에 대해 주변국가가 암묵적으로 묵시적 승인을 함으로써 영세중립국의 국제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코스타리카는 국제사회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국가도 아니며, 여타 국가들과 경제적, 안보적으로 큰 상관관계를 갖고 있는 국가도 아니기 때문에 인근 국가들의 암묵적 승인만으로도 영세중립국의 지위를 얻게 된 것이 앞선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의 사례와 다른 점이다.
한 번 영세중립국이 되었다고 해서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벨기에가 여기에 해당한다. 1914년 발생한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에 의해 침해되었으며, 유럽 열강들은 벨기에의 영세 중립을 지키지 못했다. 결국 벨기에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전했고, 전승국이 되었으며, 1919년 6월 1차 세계대전을 종결하는 베르사유 조약으로 벨기에는 영세중립국 지위를 포기했다.
룩셈부르크 역시 1867년 12월 인근 유럽국가들로 하여금 영세중립국의 지위를 승인받았다. 하지만 1940년 5월 독일의 제2차 침공을 받았을 때, 스스로 영세 중립 정책 포기를 선언하였고, 영국에서 망명정부를 세워 연합국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가했으며, 전쟁 후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했다.
과거 우리나라도 영세중립국를 선택하고자 시도한 바 있다. 대한제국 시절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벗어나 독립국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영세중립국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전개된 바 있다. 또한 앞으로 통일 이후의 국가 체제를 논의할 때도 영세 중립국 이슈가 또다시 대두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논의 속에서 기억해야 할 점은 영세중립국이라고 해서 모두 똑같은 것은 아니며, 시대적 요구와 주변 국가와의 이해 관계 속에서 그 내용과 진행 과정이 전혀 다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