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발생한 화재로 점포 9채가 불탄 서울 성동구 마장동 먹자골목에서 '이참에 상가 전체를 철거하자'는 주민들과 '삶의 터전을 지켜달라'는 상인들이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 성동구는 화재발생 안전 조치 등을 이유로 펜스 설치를 시도하다가 상인들과 마찰을 빚었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정부가 강제 단행한 이른바 '도시미관 개선사업'에서 파생된 불법 건축 문제가 30여 년 세월을 건너 본격적으로 불거진 셈이다. 중재 역할을 맡은 성동구는 난처한 표정이 역력하다.
25일 오전 찾아간 마장동 먹자골목은 전체 점포 20여 채 가운데 절반 가까이 소실된지라 검게 그을린 건물과 집기, 폭삭 내려앉은 지붕, 궤짝에 담긴 채 깨진 맥주병 등 피해 흔적이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20년간 시장에서 나온 고기 기름을 비누 공장에 납품해온 최순호(60)씨 가게도 불탔다. 이곳 상인의 상당수가 그렇듯이, 최씨에게 기름집은 가게이자 집이었다. 점포 한구석에 스프링만 남은 침대를 바라보던 최씨는 "한순간에 생업과 삶의 터전을 모두 잃었다"며 "괴롭지만 여기가 집이니 자꾸 보게 된다"고 한숨을 지었다.
막막한 상인들을 더욱 불안하게 하는 건 인근 주민들의 집단행동이다. 화재 이후 주민들은 구청에 '먹자골목을 철거하라'는 민원을 잇따라 제기하고 있다. 40년 이상 먹자골목을 지켰다는 상인 유모(83)씨는 "피해 복구는커녕 쫓겨날 판"이라며 "점포들은 단순한 가게가 아니라 삶의 근거지인데 너무 쉽게 철거를 얘기하는 거 아니냐"고 토로했다.
같은 날 오후 10시쯤엔 화재 현장 부근 안전펜스 설치를 놓고 구청 용역직원들과 상인들 사이의 충돌이 발생하면서 몸싸움이 벌어졌다. 앞서 상인들이 자체적으로 펜스를 설치했는데, 구청 측에서 굴착기 등을 동원해 추가 작업에 나서자 상인들이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대치 상황이 이어지자 양측은 상인들이 설치한 펜스를 그대로 두고 안전펜스를 덧대기로 하면서 4시간여 만에 상황은 마무리됐다. 상인들은 "자체적으로 펜스를 설치한 뒤 구청 직원들이 확인까지 해놓고 늦은 밤 갑자기 들이닥쳤다"고 반발했다. 구청 관계자는 "상인들이 설치한 펜스가 무허가였던 데다 주민 통행 등 안전을 위해 추가 안전 펜스 설치가 필요했다"며 "쫓겨나게 될 것을 우려한 상인들이 반발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화재 발생 뒤 성동구 홈페이지의 '구청장에게 바란다' 게시판에 올라온 먹자골목 철거 요청 민원은 26일 기준 42건에 달한다. 민원인들은 △점포가 국공유지를 무단점거한 불법 건축물이란 점 △폭발 위험이 있는 LPG 가스통을 모아 놓고 영업한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먹자골목 일대는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에 정부가 마장동 소 도축장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주민 일부를 이주시킨 국공유지다. 이후 이곳엔 무허가 건물이 들어서며 상가가 형성됐지만, 도시가스가 공급되지 않아 LPG 가스가 사용되고 있다. 이번 화재 원인은 아직 규명되지 않았지만, 불이 번지는 과정에서 가스통이 여러 개 폭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근 아파트 주민 A(52)씨는 "위험천만한 불법 영업 때문에 이전에도 민원이 여러 차례 제기된 걸로 아는데 결국 사달이 났다"며 "언제 또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안고 살 수는 없지 않느냐. 철거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첨예하게 맞선 상인과 주민 사이에서 성동구는 해법을 고심하고 있다. 구청에 따르면 먹자골목은 33명이 전입 신고한 주거지 성격도 있기 때문에 이곳은 서울시 인권매뉴얼에 따라 거주자 동의 없이는 강제 철거가 불가능하다. 주민 요구대로 철거하려면 자발적 퇴거 권고만 가능하다.
성동구는 양측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 22일 현장에서 주민들을 만나 의견을 청취했고, 25일 오후엔 상인들을 구청으로 불러 대화했다. 구청 관계자는 "근본적 문제 해결을 위해 관련 절차를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다"며 "향후 주민설명회와 의견 수렴을 통해 최선의 부지 활용 방안을 도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