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갈등이 23일 '대폭발'했다. 이번엔 차기 한국은행 총재 인선을 놓고 거친 파열음을 냈다. 16일 문 대통령과 윤 당선인의 회동 무산 → 21, 22일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을 둘러싼 충돌에 이어 앙금이 켜켜이 쌓이며 양측 사이에 파국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문 대통령은 오는 31일 임기가 끝나는 이주열 한은 총재 후임으로 이창용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ㆍ태평양 담당 국장을 전격 지명했다. 청와대와 윤 당선인 측이 공공기관 인사권을 놓고 대립하는 상황에서, 문 대통령의 인사는 그야말로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청와대는 “이창용 한은 총재 후보자 인선 과정에서 윤 당선인의 의견을 수렴했다”고 했다. 이에 "윤 당선인과 협의를 거친 인사를 통해 청와대가 화해 제스처를 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성장과 재정건전성을 강조해온 이 후보자는 보수 성향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윤 당선인 측은 “우리와 협의가 전혀 없었다”고 즉각 부인했다. 그러면서 "문 대통령에게 기습 일격을 당한 것"이라고 분노했다.
이로써 양측의 갈등이 '본게임'에 들어갔다는 관측이 무성하다. 갈등의 본질은 한은 총재 인사도, 회동도, 대통령 집무실 문제도 아니다. 감사원 감사위원 2명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상임위원 1명에 대한 인사를 문 대통령이 하느냐, 사실상 윤 당선인이 하느냐가 핵심이다. 감사원과 중앙선관위 모두 특정 정권의 명운을 가를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양측 협상 라인인 이철희 청와대 정무수석과 장제원 당선인 비서실장은 그간 물밑 협상 과정을 공개하는 진흙탕 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양측 모두 양보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문 대통령과 윤 당선인의 회동은 기약이 없어졌다. '협치'와 '평화로운 정권 이양'의 기운도 자취를 감췄다.
문 대통령의 이 후보자 지명을 놓고 청와대 일각에선 "윤 당선인에게 보내는 선물"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윤 당선인 측이 이 후보자를 추천해 문 대통령이 수용했다는 게 청와대 입장이다. '신구 권력 협치 인사 1호'라는 뜻이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한은 총재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윤 당선인 측 의견을 들어서 인사를 발표하게 됐다”고 확인했다.
23일 오전까지 청와대엔 화해 분위기가 흘렀다. 문 대통령은 오전 참모회의에서 윤 당선인과의 회동과 관련해 “언제든지, 조건 없이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이 후보자 지명을 계기로 양측 관계를 풀어 보자는 게 문 대통령의 의중으로 해석됐다.
장밋빛 전망은 오래 가지 않았다. 윤 당선인 측은 “한은 총재 인사를 청와대와 협의하거나 추천한 바 없다”고 공개적으로 반박했다. 장제원 비서실장은 “청와대에서 인사 발표 10분 전에 연락이 와서 어이가 없었다”며 “오늘 인사는 감사위원 임명 강행을 위한 명분 쌓기용”이라고 주장했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결국 인사권 갈등이 문제였다. 문 대통령과 윤 당선인의 지난 16일 회동이 무산된 결정적 이유는 한은 총재, 감사원 감사위원, 중앙선관위 상임위원 등 4개 자리의 인사를 둘러싼 견해차였다. 청와대는 "현 정부가 인사권을 가졌지만, 협의를 통해 의사를 반영할 수 있게 배려하겠다"고 한 반면, 윤 당선인 측은 "협의 없이 어떤 인사도 해선 안 된다"고 요구해 틀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양측은 한은 총재와 선관위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입장을 좁힌 것으로 전해졌다. 감사원 감사위원이 문제였다. "양측이 감사위원 1명씩을 추천하자"(청와대)는 입장과 "2명 모두에 대해 협의해야 한다"(윤 당선인 측)는 입장이 맞섰다.
왜 감사위원이 문제였을까. 감사원장과 감사위원은 모두 7명으로 구성되는 감사원 감사위원회 멤버다. 감사위원 2명이 가진 '2개의 표’는 정책 감사의 방향을 좌우한다. 감사원은 새 정권이 들어선 직후 전 정권을 겨누는 감사를 실시했다. △노무현 정부의 남북협력기금 감사(이명박 정부) △이명박 정부의 자원 외교 감사(박근혜 정부)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 감사(문재인 정부) 등 예외가 없었다.
양측이 팽팽히 맞서는 배경에는 "상대방이 추천한 인사는 우리 진영에 비수가 될 수 있다"는 불신이 깔린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와 윤 당선인 측은 실무협상 과정까지 까발리며 진실 공방을 벌였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기자들과 만나 “차기 한국은행 총재 후보군 하마평이 언론에 많이 나와서 윤 당선인 측에 그중 2명의 이름을 물어봤더니 ‘이창용’이라는 답이 와서 오늘 지명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장제원 비서실장은 “청와대가 정식으로 한은 총재 후보 추천을 요청한 적 없다”며 “이철희 정무수석이 '이창용씨 어떠냐'고 묻기에 내가 ‘좋은 사람 같다’고 말한 게 전부”라고 반박했다.
청와대엔 "한은 총재를 윤 당선인 의중이 실린 인사로 지명했으니, 감사위원에 대해선 윤 당선인이 물러서야 한다"는 기류가 있다. 그러나 윤 당선인 측 핵심 관계자는 “한은 총재와 감사원 감사위원 인사는 별개의 문제”라고 일축했다. 윤 당선인 측에선 청와대의 한은 총재 발표에 대해 "조건 없이 만나자면서 계속 공격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고 분노한 분위기도 감지된다.
결국 문 대통령과 윤 당선인이 만나서 꼬일 대로 꼬인 문제를 풀어야 하지만, 회동이 당분간 성사되지 않을 가능성이 커졌다. 양측은 회동 일정 논의를 위한 실무 협상도 추가로 잡지 않고 있다. 장 비서실장은 “문 대통령과 윤 당선인이 만나 얼굴을 붉히면, 지금보다 상황이 더 안 좋아진다”고 했다.
대치가 길어지면 윤 당선인이 상대적으로 더 급해질 수밖에 없다는 관측이 많다. 문 대통령이 한은 총재에 대한 인사권을 행사한 것은 감사위원과 선관위원 인사도 모두 할 수 있다는 경고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현 정권 마지막 날(5월 9일)까지 윤 당선인과 협의 없이 공공기관 인사를 할 수 있다.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을 위한 국방부 이사를 성사시킬 힘도 문 대통령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