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이 든 성배'와 대통령

입력
2022.03.25 04:30
26면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한국 축구 대표팀 감독은 '독이 든 성배'라 불린다. 손흥민 같은 슈퍼스타를 지휘하는 힘을 가졌지만 압박감도 엄청나다. 성적이 좋으면 영웅 대접을 받지만 실패하면 모든 멍에를 감당해야 한다. 최근 20년간 12명의 감독이 대표팀을 거쳐갔는데 평균 재임 기간은 1년 6개월 남짓이다. 2018년 8월 사령탑에 올라 4년째 대표팀을 지휘하고 있는 파울루 벤투(포르투갈) 감독은 예외다. 역대 사령탑 중 가장 '롱런' 중인 그는 '독이 든 성배'를 깰 준비를 마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축구에 정치를 빗대 본다. '제왕적 대통령'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우리나라 대통령의 권력은 막강하다. 그러나 퇴임 후 박수 받으며 청와대를 나온 대통령은 드물다. 정치권에선 언제쯤 '독이 든 성배'를 깰 지도자가 나올까. 요즘 벌어지고 있는 신구 권력 다툼을 보면 아직 먼 일 같다.

축구 대표팀 감독에겐 프로축구 감독들이 '야당' 같은 존재다. 선수 차출 문제를 놓고 협조하고 견제하며 갈등한다. 대표팀 사령탑은 우수한 선수를 뽑아 최대한 오래 점검하고 조직력을 다지고 싶어 한다. 그 선수의 소속팀이 어디인지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구단은 다르다. 선수가 한꺼번에 빠져나가 '1년 농사'를 망칠 수도 있어 늘 예민하다.

대표팀에 5~6명의 선수를 싹쓸이당한 프로 사령탑들은 "프로축구가 살아야 한국 축구도 산다"고 호소한다. 구단을 배려하란 얘기다. 반면 대표팀 감독은 "선수 선발은 전적으로 내 권한"이라고 응수한다.

차출 갈등을 둘러싼 축구인들의 '내로남불' 행태도 정치인 못지않다. "프로 팀을 배려하라"던 사람이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뒤 선수 선발 권한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가 하면 "선수 선발은 대표팀 감독 고유 권한"이라 부르짖던 이가 프로 사령탑이 된 뒤 국가대표 감독을 "독재자"라고 비난한다.

이런 줄다리기에서 예외였던 감독이 2002년 4강 신화의 주역 거스 히딩크(네덜란드)였다. 1년 6개월 재임기간 동안 훈련 일수가 231일(월드컵 본선 32일 제외)에 달했다. 원 없이 모든 선수를 불러다 썼다. 온 국민의 염원인 월드컵이 한국에서 열려 프로구단들이 대표 차출을 감히 거부할 수 없었던 탓이다. 또 당시 유럽에서 뛰는 선수가 설기현과 안정환, 두 명뿐이라 이런 무자비한(?) 차출이 가능했다.

오미크론 변이가 불어닥치기 전까지 성공적이라 평가받던 'K방역'이 의료인의 헌신과 자영업자의 희생, 국민의 적극적인 참여로 만들어진 결과물이듯 프로구단의 일방적 희생이 아니었다면 20년 전 4강 신화도 없었을 것이다.

국제축구연맹(FIFA)은 각종 대회별, 경기별로 국가대표 선수를 소집할 수 있는 기간을 세세하게 규정해 선수 차출 갈등을 최소화했다. 그러나 특정 구단의 쏠림 현상까지 막진 못하고 있다. 대표팀 감독에게 구단별로 2명씩 공평하게 뽑으라거나, 한 팀당 5명 이상은 차출이 안 된다고 강제할 수 없는 노릇이다. 방법은 국가대표와 프로 감독이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는 것뿐인데 이런 경우는 축구계에서도 극히 드물다.

다시 정치권으로 눈을 돌려보자. 여야 정권교체기 때마다 반복되는 '알박기 인사'를 둘러싼 불협화음을 막을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 전·현직 대통령이 인사권을 놓고 다투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5년마다 봐야 하나 싶어 씁쓸하다.

윤태석 정책사회부 차장
sportic@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