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포항시의 한 폐양식장에서 고양이 여러 마리를 숨지게 하고 사체를 훼손한 동물학대 사건이 발생하자 온라인 동물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청와대 국민청원에 그칠 것이 아니라 대법원 양형위원회에 동물학대 범죄 양형기준 마련을 직접 건의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
앞서 ①동물판 n번방이라 불렸던 '고어전문방' 사건 ②'디시인사이드' 고양이 학대 사건 ③푸들 19마리 학대·폐사 사건 당시, 정부는 "대법원 양형위원회에 양형 기준 마련을 요청했다. 변화된 인식에 부합하는 양형기준 마련을 지속 협의해 가겠다"고 밝혔지만 실질적 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양형 기준은 법관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형량 차이가 지나치게 들쑥날쑥한 일을 막기 위해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일선 재판부에 제시하는 일종의 참고 자료입니다. 구속력은 없지만 양형 기준에서 크게 벗어나는 경우 재판부는 합리적 사유를 판결문에 기재해야 해 양형의 일관성을 갖출 수 있습니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범죄 발생 빈도가 높거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범죄부터 양형기준을 만들고 있습니다.
동물권단체가 아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동물학대 범죄에도 양형기준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최근 포항에서 벌어진 끔찍한 고양이 학대 사건 때문입니다.
동물권행동 '카라' 등에 따르면 20대 A씨는 지난달부터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고양이 사체를 훼손한 사진을 올리기 시작합니다. 시민들은 구체적 학대 정황, 사건 발생 장소들을 조사해 카라에 협조를 구했는데요.
또 다른 한 시민은 앞서 좁혀진 정보를 토대로 흥신소에 의뢰, 학대가 발생한 장소를 포항시 남부 호미곶면의 한 폐양식장으로 특정했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심하게 훼손된 고양이 사체 대여섯 구와 살아있는 고양이 여덟 마리가 갇혀 있었습니다. 폐양식장의 깊이는 고양이들이 스스로 그곳을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카라와 포항 동물보호단체 '유토피아', 한동대 길고양이 보호 동아리 '한동냥이', 그리고 포항시민들은 21일 새벽 급히 현장을 찾아 고양이 여덟 마리를 구조하고 피의자 A씨의 가족으로부터 고양이 한 마리를 인계받았습니다.
시민들과 직접 사체를 수습하게 된 이유에 관해 카라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이 현장을 보고도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증거 보존을 위해 직접 현장을 수습했다"고 인스타그램 계정에 설명했습니다.
현재 포항남부경찰서는 20대 A씨를 동물보호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해 사건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경찰에 "호기심에 범행을 저질렀다"며 일부 혐의를 인정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며 22일 A씨에 엄벌을 요청하는 청와대 국민청원도 공개됐는데요. 하루도 지나지 않아 2만 명이 넘는 사전 동의 인원을 모았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이번 사건은 국민청원에 그치지 않고 대법원 양형위원회 민원으로까지 나아갑니다. 21일 온라인 커뮤니티 '고양이라서 다행이야'에 양형기준의 중요성을 알리는 글이 올라오는데요.
작성자는 시민들이 포항 사건을 자체 조사할 때부터 관심 있게 지켜봤던 강모씨였습니다. 그는 국민청원 동의 인원 20만 명을 넘길 정도로 전 국민의 공분을 일으켰던 동물학대 사건들을 나열하며 "정부가 공통적으로 동물학대 범죄 양형기준 마련을 얘기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뭐라도 해보자, 가만히 있으면 제자리일 뿐이다. 어렵게 생각 말고 본인의 의견을 간단히 남겨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사법기관에 민원글을 남기는 게 어색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은 '동물보호법은 조금씩 개정되고 있으나 법원의 실제 판결은 벌금형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디 동물학대 범죄 양형기준이 마련되어 일관되게 엄중한 처벌을 내릴 수 있도록 해주세요'라고 썼다고 밝히기도 했죠.
그러자 커뮤니티 이용자들은 "이런 게 있는 줄 몰랐다", "대법원 양형위원회에 꼭 남기겠다"고 동참 의사를 속속 밝히고 있습니다.
강씨에게 글을 올리게 된 계기를 물어봤는데요. 그는 한국일보에 "이번 포항 구룡포 사건을 접하며 너무 빈번히 반복되는 잔인한 학대사건에 크게 절망했다가 정말 할 수 있는 건 뭐라고 해야겠다 싶었다"고 밝혔습니다.
특히 양형기준 마련을 촉구하게 된 이유에 대해 "사실 크게 이슈가 된 동물학대 사건 때마다 양형기준을 만들어야 한다는 글이 올라왔었는데 이번 포항 사건을 보고 문득 그 내용이 떠올랐다"고 했습니다.
강씨는 "이번 기회에 다시 자세히 검색해 봤는데 청와대 국민청원 (정부의) 답변에도 꼭 등장하는 말이더라"며 "많은 분들이 의견을 제출해 주신다면 사안을 무시하기 힘들지 않을까 생각해 관련 내용을 정리해 카페에 올리게 됐다. 많은 분들이 관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했습니다.
강씨의 말처럼 최근 잔인한 동물학대 범죄가 반복되면서 양형 기준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살해 모의, 감금, 참수, 해부, 사체 전시 등 학대 방법은 날로 잔혹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벌금형에 그쳐 범죄 예방은커녕 경각심을 일으키기에도 역부족입니다. 국민들의 동물권 감수성을 법원이 못 따라가고 있다는 지적까지 나옵니다.
'고어전문방' 사건의 경우 학대 방법이 잔혹했음에도 1심이 '범행 이후 동물 보호를 위한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징역 4월 및 벌금 100만 원의 집행유예를 선고해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이라는 비판이 거셌죠. 피고인들을 엄벌해야 한다는 국민청원엔 27만 명 이상이 뜻을 함께했습니다.
기준이 없다 보니 개별 재판부의 동물권 감수성에 따라 형량 차이가 큰 것도 문제입니다. 2020년 울산지법이 밍크고래를 불법 포획한 선원 9명에 통상의 벌금형을 깨고 징역 8월~2년의 실형을 선고한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이 재판부는 진돗개의 목을 밟거나 각목으로 때려 학대한 사건에서도 통상보다 높은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하기도 했습니다. 당초 검찰이 벌금형의 약식명령을 청구한 사건인데도 말입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동물학대 범죄의 양형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지난 2월 카라가 주최한 긴급 토론회에서 주현경 충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사람에 대한 상해, 살해 관련 법령과 비교했을 때 동물보호법은 이미 그 형량 기준이 충분히 마련돼 있으나 그에 걸맞은 양형기준 설정을 통한 선고형의 실질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최민경 카라 정책행동팀 팀장은 한국일보에 "범죄 전문가들도 '반드시 잡힌다', '죄에 따른 합당한 처벌을 받는다'는 메시지가 범죄 예방에 중요한 부분인데 동물학대 범죄는 잘 안 잡히고 잡혀도 가벼운 처벌에 그친다고 꼬집는다"고 전했습니다.
앞서 카라는 지난해 11월 동물학대 범죄 양형기준을 촉구하는 캠페인을 진행했었는데요. 이번 포항 사건을 계기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양형위원회에 민원을 남기는 모습엔 "반갑기도 하고, 홈페이지까지 들어가서 게시판에 글 남기는 일이 수고스러운데 오죽하면 '우리라도 나서야 된다' 싶은 마음이 들었겠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사실 정부에서 진즉에 적극적으로 양형위원회에 협조를 요청했으면 좋았을 거란 아쉬움도 있다"며 "조속히 양형위원회의 안건으로 올라갔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밝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