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바이러스가 강원도 고향집에도 들이닥쳤다. 마을 주민 대부분이 70세 이상인 데다 주민 수가 몇 명 되지 않아 이웃끼리 마주칠 일도 거의 없는 한적한 마을인데 운이 없었던 것이다. 무증상 감염자였던 옆집 아주머니와 사과를 나눠 먹은 뒤 여동생이 고열에 시달린 뒤 확진 판정을 받았다. 장애가 있어 일거수일투족을 챙겨줘야 하는 동생을 격리시키는 게 불가능했기에 어머니는 감염을 각오할 수밖에 없었다. 이틀 뒤 어머니도 확진 판정을 받았다.
어머니는 내게 "니들까지 코로나에 걸리면 안 되니 절대 오지 말라"고 하셨다. 남들 다 겪는 건데 큰일 없을 거라며 형님과 나를 안심시켰다. 내가 간다고 해도 도움을 받을 분이 아니었다. 매일 동생을 돌보러 오던 사회복지사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셨던 어머니였다.
1주일간 나는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한 심정이었다. 동생은 아파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고, 여든 셋의 고령이신 어머니는 동생을 보살피느라 밤잠도 제대로 못 주무실 게 뻔했다. 하루에 서너 번씩 전화를 걸어 몸 상태를 여쭤 볼 때마다 어머니의 대답은 똑같았다. "괜찮지 뭐~." 하지만 괜찮은 게 아니었다. 어머니는 그냥 참으며 버틴 것이었다.
다행히 이틀간 고열에 시달렸던 여동생은 더 이상의 악화 없이 1주일을 넘겼고, 어머니도 종합 감기약만으로 인후통, 기침 증상을 잡을 수 있었다. 몸 상태가 조금 좋아지자 '강한 엄마 본능'이 되살아났는지 어머니는 통화를 할 때마다 내게 당부한다. "우리 사장님도 제발 좀 조심하시오~. 마스크 꼭 쓰고 다니고!"
어머니는 늘 그런 모습이었다. 근심 걱정이 넘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상황이 닥치면 더 악착같이 버티셨다. 13년 전 내가 대장암 치료를 받을 때 어머니께 걱정을 끼치기 싫어 한동안 사실을 감췄다. 어머니는 그걸 알고도 모른 척했다는 걸 한참 뒤에 나는 알았다. 아들이 암으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도 혼자 두려움을 참아내셨던 것이다.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로 의료 시스템이 대혼란에 빠졌을 때 아버지가 폐결핵 진단을 받았다. 전염성이 워낙 강한 질병이라 아버지는 격리 병실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독한 약을 이기지 못해 사경을 헤매시다가 간신히 회복하셨다. 어머니는 집에 혼자 둘 수 없는 여동생과 수시로 어머니를 찾는 아버지를 돌보느라 밤잠과 끼니를 거르면서도 아들에게는 힘든 내색도 않으셨다.
지난 1, 2월 이모님 두 분이 요양병원에서 돌아가셨다. 외숙모 한 분, 당고모 두 분까지 합하면 최근 넉 달 사이 어머니 세대의 집안 어른 다섯 분이 한꺼번에 세상을 뜨자 "니 외삼촌까지 줄초상이 날 것 같다"고 힘들어 하셨다. 10남매의 막내로 유난히 정이 많으신 어머니에겐 크나큰 상실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얼마 가지 않아 슬픔을 거둬들였다. 평생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는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다. 어머니는 가끔 말씀하신다. "내가 죽기 전에 자(저 아이)를 앞세워야 하는데…" 오랜 세월 어머니가 지켜온 강인함이 사실은 책임감의 다른 얼굴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 나는 어머니가 짊어진 어깨 위의 짐을 내려놓을 방법을 조심스럽게 찾고 있다. 혹시 어머니의 삶의 의미를 빼앗을지도 모르니까. 여동생을 대신해 하루 한 번씩 수다를 떠는 것도 내가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