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20일 대통령실의 용산 이전을 공식화하면서, 70년 넘게 권력의 중심을 상징했던 청와대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조선시대를 포함해 지난 600여년간 '정치 1번지' 역할을 해왔던 경복궁, 광화문 일대의 정치적 위상도 약화될 전망이다.
청와대는 예부터 풍수지리가들이 명당으로 주목한 곳이다. 고려 숙종(1054∼1105년) 때 풍수지리가 김위제는 상서에서 "삼각산(북한산)은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한 선경(仙境)이다. 그곳에서 시작한 산맥이 3중, 4중으로 서로 등져 명당을 수호하고 있으니, 삼각산에 의지해 도읍을 세우면 9년 만에 사해가 와서 조공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이에 고려 숙종이 지금의 서울에 남경(南京)을 설치했고, 당시 별궁이 있던 터가 지금의 청와대 자리였던 것으로 역사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이후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신하들을 한양에 보내 궁궐, 종묘 등의 터를 정하게 했는데, 이들 역시 고려 남경의 궁궐터였던 자리를 다시 골랐다.
청와대 자리는 조선 태조 4년(1395년) 경복궁이 창건되면서 궁궐의 후원으로 사용됐다.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총독부는 이곳에 건물을 짓고 총독 관사로 이용했다. 이후 1948년 정부가 수립되며 이승만 전 대통령이 '경무대'라는 이름을 짓고 관저 및 대통령 집무실로 이 건물을 사용하게 된 것이 청와대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푸른 기와 집을 뜻하는 청와대의 명칭을 가장 먼저 사용한 것은 윤보선 전 대통령이다. 윤 전 대통령은 당시 4·19 혁명 분위기 속에 경무대가 지닌 부정적 인식을 고려해 이름을 바꿨다. 이후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까지 이곳을 사용했다. 특히 조선 왕조의 6조처럼 광화문 앞에 정부서울청사와 외교부, 서울경찰청 등 주요 시설이 자리하면서 청와대는 명실상부한 '권부의 심장'으로 자리잡았다.
청와대는 역사의 한가운데서 최고 권력자와 영욕을 함께 해 왔다. 대표적인 게 1968년 1월 12일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무장대원 31명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살해하기 위해 청와대 뒷산으로 침투한 이른바 '1·21 사태'다. 1979년 10월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청와대 부지 내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탄에 맞고 숨지는 '10·26 사태'가 벌어졌다.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가 열리던 2008년 이명박 전 대통령은 특별회견을 통해 "광화문 일대가 촛불로 밝혀졌던 그 밤에 저는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 끝없이 이어진 촛불을 바라봤다"고 언급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