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우리가 알던 '전쟁'의 양상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앞장서 러시아에 대한 '자율 제재'에 나섰고, 세계 각국의 시민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우크라이나를 응원하며 '여론전'을 펼치고 있다. 자국 통신 인프라가 무너진 우크라이나 군이 해외 기업이 제공한 장비로 인터넷도 사용한다. 국가가 모든 권력을 전유하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정보기술(IT)에 기반한 새로운 '힘'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20일 IT업계와 외신 등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편에 서서 러시아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민간 세력은 미국 실리콘밸리의 빅테크 기업이다. 스타링크(Starlink)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페이스X가 대표적이다.
스타링크는 일론 머스크가 설립한 우주기업 스페이스X의 위성 인터넷 서비스다. 저궤도 위성 총 4만2,000대를 쏘아 올려 지구 어느 곳에서나, 누구든 24시간 자유롭게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게 만들겠다는 머스크의 꿈이 담긴 사업이다. 초고속 인터넷망이 방방곡곡에 깔린 한국과 달리 미국 등에서는 인터넷 연결이 되지 않는 곳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2020년부터 세계 28개국에서 시범 운영에 들어갔고 현재 2,000여 기의 위성이 운용 중이다.
스타링크는 러시아의 공격으로 인터넷망이 불안정한 우크라이나에 든든한 백업 통신망이 되어주고 있다. 지난달 26일 미카힐로 페도로프 우크라이나 부총리의 'SOS' 요청에 머스크가 화답하며 스타링크 장비를 두 차례에 걸쳐 제공했다.
미 일간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스타링크 시스템은 우크라이나 전체 인터넷망을 복구할 만큼의 성능을 제공하지 못하지만 통신이 끊긴 시민이나 기업들이 인터넷에 접속하거나 우크라이나 군이 드론을 운용할 때 사용되고 있다.
글로벌 IT기업들도 각자 다른 방식으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메타(Meta)는 지난 10일 자사 SNS인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서 러시아 정치인을 규탄하는 발언을 허용하기 위해 폭력적 콘텐츠 관련 규정을 일시적으로 완화하기까지 했다. 러시아 국영매체 계정을 강등시켜 추천 알고리즘이나 검색 결과에 나타나지 않게 하는 등 이용자의 접근을 막은 데 이은 후속조치다. 메타 측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응해 '러시아 침략자들에게 죽음을'과 같이 평소 규정에 어긋난 폭력적 발언과 정치적 표현을 일시적으로 허용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힌 바 있다. 트위터도 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 국영 매체 콘텐츠에 경고 표식을 달고, 가짜 뉴스를 유포하는 계정 7만5,000여 개를 삭제했다고 밝혔다.
스타링크처럼 우크라이나에 대한 직접 지원도 증가하고 있다. 미국 인공지능(AI) 스타트업 클리어뷰는 우크라이나 국방부에 러시아 간첩 등을 식별하는 용도로 안면인식 기술을 무료로 제공하기로 했다. 캐나다 위성 기업 MDA는 자사 위성으로 촬영한 러시아 군의 이동 현황을 실시간으로 우크라이나 측에 제공하고 있다. 전쟁의 구도가 물리력을 중심으로 한 국가 대(對) 국가가 아닌, IT기술을 중심으로 한 민간 대 국가의 구도로 변모한 셈이다.
국제사회 시민들도 '디지털 전쟁'에 동참했다. SNS에서는 '#StandWithUkraine(우크라이나를 지지합니다)' 해시태그를 붙여 우크라이나를 응원하는 운동이 시작됐다.
정부가 민간에 지원을 요청하는 기현상까지 벌어졌다. 미국 정부는 여론전의 승기를 잡기 위해 동영상 플랫폼 틱톡의 '스타'들에게 손을 벌렸다. 미 백악관은 지난 10일 동영상 플랫폼 틱톡의 상위 인플루언서 30명을 대상으로 우크라이나 전황을 브리핑했다. 이들의 영향력으로 전쟁의 참상을 정확히 전달하려는 취지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지난 15일부터 암호화폐 업체인 에버스테이크(Everstake) 등과 협력해 암호화폐 기부 사이트를 개설, 시민들로부터 코인 기부를 받고 있다. 알렉스 보르냐코프 우크라이나 디지털전환부 차관에 따르면 지난 18일 기준 기부금은 1억 달러(약 1,200억 원)를 돌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