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지향은 친일이 아니라 개혁이었다

입력
2022.03.28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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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 김옥균


김옥균은 1894년 3월 28일 중국 상하이에서 조선인 홍종우가 쏜 권총 세 발을 맞고 숨졌다. 청나라를 업은 민씨 일파의 척족 수구세력을 몰아내고 일본의 힘을 빌려 조선을 개혁하려 한 갑신정변 후 10년여 만이었다. 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 수차례 암살 위기를 모면하고 일본 본토에서 1,900km 떨어진 오세아니아의 오가사와라 제도와 일본 북단 홋카이도에서 유배생활을 치른 끝이었다. 향년 43세.

김옥균은 충남 공주 명문가에서 태어나 유학을 공부하는 한편 개화사상가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 등과 교유하며 서양 문물과 사상을 폭넓게 익혔다. 만 21세 때인 1872년 문과 알성시에 장원급제해 벼슬살이를 시작했지만, 그에게 조선 조정은 좁고 썩은 우물이었다. 3년 뒤 운요호 사건이 일어났고, 조선은 최초이자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으로 위신과 실리를 잃었다.

그는 홍영식, 민영익, 박영효 등과 비밀 사조직인 '충의계'를 결성, 조선 개혁과 근대화의 이상을 구체화했다. 신사유람단을 따라 일본을 드나들며 조선과 제련, 탄광 굴착술 등 근대의 현장과 군수공장, 조폐국 등을 시찰했다. 그 와중에 임오군란(1882)이 일어났지만 청나라의 개입으로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척화파가 축출됐다. 남은 수구세력은 민씨 일파였다.

김옥균의 개혁 구상에는 훗날 동학혁명과 갑오개혁으로 현실화하는 신분제와 문벌 철폐, 인재 공개채용, 왕실·국가 재정 분리, 형사·사법 개혁 등이 포함돼 있었고, 화폐개혁과 회사제 도입을 골자로 한 경제개혁안,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비롯해 외세의 간섭을 차단하기 위한 조선의 영세중립국 구상까지 있었다.

갑신정변은 일본의 지원 약속과 고종의 묵인이라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청과 민씨 일파의 압박과 위협에 쫓기며 황급히 꺼내 들 수밖에 없었던 칼이었다. 그의 지향은 친일이 아니라 개혁이었다. 33세 비운의 혁명가 김옥균의 칼은 청군의 개입으로 사흘 만에 부러졌다.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