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은 꺼졌지만 야옹이는 돌아오지 못했다

입력
2022.03.19 12:00




상처투성이 얼굴에 시커멓게 그을린 몸통. 그래도 '야옹이'는 눈빛 만은 살아 있었다. 동해안 산불이 한창 번지던 지난 6일, 경북 울진군 북면 소곡 1리 마을 입구 노인정 앞뜰에서 야옹이를 만났다. 이미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뒤, 주민들마저 임시 보호소로 떠난 뒤라 마을은 인적이 끊겨 있었다.

멀리서 봤을 때 여유롭게 햇볕을 받으며 뒹구는 것 같았지만, 야옹이는 온몸에 심한 화상을 입은 채 고통받고 있었다. 사람 인기척에 놀라 몸을 일으키는 순간 화상으로 인한 상처가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안쓰러운 마음에 가지고 있던 비상식량을 건네며 다가가 봤으나 녀석은 낯선 사람을 피해 달아나기 바빴다. 발바닥까지 화상을 입어 한 걸음 한 걸음 절뚝거리면서. 그게 야옹이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16일 야옹이의 생존을 확인하기 위해 마을을 다시 찾았다. 마을은 아직 복구가 되지 않았고 야옹이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돌아서는 길에 야옹이를 아는 주민을 만났다. 마을 입구에서 양봉업을 하는 그는 산불 당시 화상을 입고 있던 고양이 사진을 보여주자 '야옹이'라고 단번에 알아봤다. 그는 "야옹이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가까이서 돌본 지 4년쯤 됐다"고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야옹이는 결국 살아남지 못했다. 산불이 지나간 며칠 후 양봉장 인근에서 야옹이를 발견했지만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

당시 야옹이 사체를 수습한 고양이 보호단체 대표는 "지난 9일 주민 신고를 받고 출동해 화상을 입은 고양이 두 마리를 구조한 뒤 배수로 철망에 쓰러져있던 야옹이를 구조했지만 이미 죽은 상태였다”고 전했다. 야옹이 사진을 본 대표는 연신 눈물을 흘렸다. 그는 “조금만 더 일찍 발견해 병원에서 치료했으면 충분히 살릴 수 있었다”며 “지금이라도 다친 고양이를 구할 수 있다면 달려가고 싶다”고 말했다.


야옹이는 떠났지만 사체 수습 당시 구조된 고양이 두 마리는 현재 서울로 이송돼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야옹이네 마을 인근의 신화 1리에서도 또 다른 길고양이 '방울이'가 지옥불 같은 화마 속에서도 운 좋게 목숨을 건졌다.

산속에서 양봉업을 하는 라모씨는 평소 자신을 잘 따르는 방울이에게 먹이를 챙겨주는 등 가족같이 지냈다. 산불이 번진 그날 라씨는 양봉장에 옮겨붙은 산불을 끄다 화상을 입은 채 배수로에 웅크리고 있는 방울이를 발견해 구출했다. 구조 당시만 해도 화상이 깊어 살기 어려울 것 같았던 방울이는 동물보호단체의 도움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고, 지금은 라씨 곁에서 회복 중이다. 라씨는 "200개의 벌통 중 겨우 10개 만 건진 게 비통하지만 고통과 싸우는 방울이를 보면서 다시 한번 삶의 의지를 불태운다"고 말했다.


대규모 산불 현장에서는 인간뿐 아니라 많은 동물들이 피해를 입는다. 그나마 집에서 기르던 가축이나 반려동물의 경우 주인의 보살핌 덕분에 목숨을 건지고, 다치더라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하지만 마을에서 함께 살던 많은 길고양이들은 뜨거운 화마에 휩싸여 속절없이 죽어간다. 야옹이처럼.

뜨거운 불길 속에서 심하게 다친 길고양이들은 산불 때문에 경계심이 커진 탓에 도움의 손길마저 외면하다 죽어가기도 한다. 이 지역 길고양이 보호단체 관계자는 “마을은 폐허가 됐지만 고양이 먹이를 계속 공급하고 장기적으로는 중성화 수술 등을 통해 사람과 어울려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울진·삼척 등 동해안 일대를 휩쓴 이번 산불은 총 213시간 43분 만에 완전히 진화됐다. 장시간 이어진 화재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소 8마리와 닭 200여 마리 등 적지 않은 가축이 목숨을 잃었다. 야옹이처럼 불에 그을려 폐사한 길고양이나 야생 동물의 숫자는 집계조차 안 된다.




왕태석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