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과학적 개념 중 하나는 '원자'일 듯싶다. 초등학생들도 만물을 이루는 기본 단위가 원자라는 걸 안다. 허나 원자가 과학자들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건 불과 120여 년 전의 일이다. 결정적 계기는 아인슈타인이 만들었으나 그 출발은 19세기 초 스코틀랜드의 한 실험실에서 비롯됐다. 식물학자인 로버트 브라운은 현미경으로 물 위에 떠 있는 꽃가루를 관찰하던 중 꽃가루가 살아 있는 양 무작위적으로 움직이는 현상을 발견했다. 이것이 소위 '브라운 운동'이다.
그는 주변 입자가 꽃가루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합리적으로 추론했지만 이를 설명할 이론은 1905년 아인슈타인의 논문으로 발표됐다. 그는 눈에 보이는 꽃가루가 보이지 않는 물 분자와 끊임없는 충돌로 무작위 운동을 한다고 봤고 실험으로 확인할 수 있는 예측을 내놓았다. 이를 실험으로 검증한 프랑스의 장 페랭은 그 공로로 1926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이들의 업적은 원자의 실재성을 부정하던 일부 과학자들의 마음을 돌리며 원자론이 굳게 뿌리내리는 계기를 만들었다.
물 분자에 부딪히며 제멋대로 움직이는 꽃가루의 운동은 흡사 주정뱅이의 걸음과 닮아 있다. 술에 취해 방향 감각을 상실한 사람의 걸음은 수학적으로 무작위 걷기에 해당되고 브라운 운동과 같은 자연 현상, 주식과 옵션을 다루는 금융공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어 온 모델이다. 그런데 이 모델이 우주의 비밀을 파헤치는 방법 중 하나로 대두하고 있다.
2017년 노벨물리학상은 한 세기 전 아인슈타인이 일반 상대성이론을 통해 예측했던 중력파 관측에 기여한 세 과학자에게 수여됐다. 질량을 가진 물체가 가속할 때 형성되는 시공간의 변형이 빛의 속도로 퍼져 나가는 중력파는 그 변화가 너무 작아 '레이저 간섭계 중력파 관측소(LIGO)'와 같은 매우 정밀한 과학시설을 구축해 10년 전 처음 검출됐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직접 관측된 중력파 신호는 약 13억 광년 떨어진 곳에서 발생한 두 블랙홀의 충돌과 병합으로 탄생한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주 공간은 블랙홀과 같은 천체들의 충돌 외에도 빅뱅 후 초기 우주에서 형성된 신호를 포함, 온갖 종류의 중력파 신호들이 가득 차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유럽의 과학자들이 발표한 이론은 지구-달 사이의 거리를 정밀 측정해 중력파에 대한 정보를 얻는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온갖 중력파 신호가 도착하는 지구와 달은 흡사 물 위에 떠 있는 꽃가루와 비슷한 상황에 있다. 서로 중력으로 묶여 도는 지구와 달도 중력파를 방출하는데 이 파동이 사방에서 도착하는 중력파와 간섭하면서 지구와 달 사이 거리나 궤도가 미세하게 변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흡사 마구잡이로 부딪히는 물 분자에 의한 꽃가루의 무작위 운동처럼 말이다. 꽃가루의 운동으로부터 원자를 더 잘 알게 된 것처럼 지구-달의 운동의 점진적 변화를 정밀하게 측정한다면 이를 일으키는 중력파의 기원, 더 나아가 우주 탄생의 비밀에 한발 더 접근할 수도 있다.
주정뱅이의 무작위 걸음 모형은 꽃가루의 브라운 운동을 설명하는 이론적 근거로 작용하며 원자의 존재를 밝히는 중요한 첫걸음이 되었다. 이제 이 모형이 사방에서 몰려드는 중력파가 지구와 달의 운동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 그간 무작위 중력파원의 측정 방법이 여럿 제시되었으나 본 연구는 매일 밤 다정하게 얼굴을 내미는 달을 천연 중력파 검출기로 활용하자는 신선한 제안이다. 이런 가설의 검증은 보통 수년에서 수십 년에 이르는 끈질긴 검토와 측정을 요구한다. 경제에는 하등의 도움도 안되는 이런 순수 연구의 맥이 수십 년 동안 이어질 수 있는 국가야말로 과학의 저력이 살아 있는 곳일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