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러 제재로 삶이 팍팍해졌다"...고립되는 러시아인·교민 인터뷰

입력
2022.03.15 04:30
17면
[러시아인 2명, 교민 2명 본보 인터뷰]
반전 여론·각종 제재 아랑곳 않는 푸틴 
크림반도 병합 때 제재와 확실히 달라
스위프트 배제로 생활 확 달라져 
반미 여론 심화하는 역효과도
러시아인 상당수 우크라에 가족·친구 둬
"자랑스럽던 조국이 침략국 돼버렸다"


"갈수록 삶의 모든 선택지가 좁아지고 있다"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대학교에 다니는 엘리자베스 우세이노바(22)는 국제사회의 대러 제재로 닥친 일상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달 초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 배제가 시행된 후 우세이노바는 우크라이나에 있는 친척들에게 아무런 금전적 도움을 줄 수 없게 됐다. 은행의 해외 송금 시스템과 마스터 카드가 모두 막혔기 때문이다. 며칠이 지나자 모스크바 시내 영화관에선 할리우드 영화를 볼 수 없게 됐고, 페이스북도 접속할 수 없었다. 자주 들렀던 맥도널드도 문을 닫으면서 햄버거를 즐길 수 없다. 우세이노바는 "러시아가 고립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고 토로했다.

한국일보는 스위프트망 배제가 시행된 후인 지난 3일부터 우세이노바와 엘레나(28·가명) 등 러시아인 2명과 교민 이상수(65)씨, 최모(59)씨 등 2명을 인터뷰했다. 인터뷰는 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3~13일 사이 이뤄졌다.

제재 목록 중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건 스위프트 배제다. 해외 거래가 불가능해지며 수입품 가격은 30% 이상 폭등했다. 수출 기업들은 신규 주문이 끊겼다. 대부분의 한인들은 한국에서 물건을 들여와 판매하는 일을 하는데 달러화 송금이 막혀 곤욕을 치르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나무젓가락 수출 사업을 하는 이씨는 "2014년 크림반도 합병 때도 제재가 있었지만, 그땐 우리가 책임지겠다는 서명이라도 하면 송금이 가능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중국을 통해 위안화-루블화로 환전하는 방법도 알아봤지만, 위안화 계좌를 새로 만드는 것도 안 된다고 하더라"고 토로했다. 그는 “다른 러시아 사업가들도 이제 위드 코로나니까 재기할 기대가 있었는데 전쟁으로 박살이 났다고 혀를 내두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직 사회 전반에 '패닉'은 없다. 정부는 두둑한 외화보유액을 기반으로 1만 달러(약 1,200만 원) 초과 외화 국외 반출 금지, 외화 수입 80% 이상 매각 등의 조치로 충격을 완화하고 있다. 애플페이 같은 전자결제가 막히긴 했지만 신용·체크카드는 사용할 수 있다. 모스크바 거주 30년이 넘은 최씨는 "제재가 발표된 지난 월요일(2월 28일)엔 시민들이 달러를 인출하려고 현금자동인출기(ATM) 앞에서 난리였는데 지금은 안정을 찾는 분위기"라며 "카드 결제도 일부 되긴 하니까 생활에 큰 불편은 없다"고 전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유럽대학 석사과정 중인 엘레나와 우세이노바도 "일상생활에 큰 어려움은 없다"고 밝혔다.

문화·스포츠 분야 제재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지지층의 마음을 돌리기보단 '역효과'만 낸다는 의견도 있다. 제재 대상과 제재로 인해 실제 어려움을 겪는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엘레나는 "고령인 푸틴 지지층이나 고위 관료들은 틱톡이나 넷플릭스가 막힌 건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라며 "이런 플랫폼을 사용하는 젊은층은 대부분 푸틴의 정책에 반대한다"고 설명했다. 우세이노바도 "국제 사회의 경제 제재는 찬성하지만, 왜 이런 문화 콘텐츠까지 막아 러시아 시민들을 '처벌'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많은 러시아인들에게 우크라이나는 '이웃 국가' 이상이다. 교민들은 남북관계에 비유했다. 민족 구성이 비슷하고 오랜 역사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최씨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은 슬라브 민족이 많고, 키릴문자를 공유해 교류가 활발했다”며 “부모 한 분은 우크라이나인, 한 분은 러시아인인 경우도 많다”고 설명했다. 친척 대다수가 우크라이나인인 우세이노바는 이번 전쟁으로 가족들을 잃을 뻔했다. 그는 "할머니가 (우크라이나 밖으로) 피란 가시기 전까지 공격을 받을까 봐 10분에 한 번씩 전화로 안부를 확인했다"며 "우크라이나에 친척이 있어 나처럼 밤새 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친구들이 절반 이상"이라고 말했다.

이런 시민들의 사정과 달리 푸틴 대통령이 전쟁을 중단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러시아 정부가 자국 내 반전 여론을 억압하며 침공을 강행하고 있어서다. 4일엔 '언론통제법'을 통과시켜 정부 입장과 다른 정보를 퍼뜨리면 최대 징역 15년에 처하도록 했다.

일부 러시아인들은 체포 위험을 감수하며 시위에 참가하고 있다. 엘레나도 그중 하나다. 엘레나는 러시아의 침공이 전면화된 지난달 24일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반전시위에 6번 참여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에 평화를' 같은 문구가 적힌 종이를 들고 걸어가는 평화시위지만 이런 행동도 체포될 수 있어 위험하다"며 "그래도 계속 거리에 나갈 것”이라고 의지를 다졌다.

푸틴 대통령을 지지하며 전쟁에 찬성하는 시민도 적지 않다. 반미 여론은 더 심해지고 있다고 이씨는 설명했다. 그는 "미국은 군사를 보내 싸우지도 않으면서 러시아를 약화, 분열시키고 있으니 '손 안 대고 코 풀기'라고 다들 생각한다"며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동부 유럽 국가들은 가입시키지 않겠다고 해놓고는 하나씩 포섭하고 가입시키니까 사태가 벌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러시아인도 많다”고 전했다.

두 러시아 젊은이는 전쟁으로 고국에 대한 자부심이 무너졌다고 했다. 엘레나는 "러시아 역사와 문화를 사랑했고, 러시아인이라는 자부심을 느꼈는데 '침략국'이 돼 민간인까지 공격한다는 게 마음 아프다"고 말했다. 우세이노바는 "전 세계가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며 러시아를 고립시키는 상황이 1920년대 독일과 비슷하다"며 "이 역사의 결과가 어땠는지 알고 있다. 더 상황이 나빠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고 우려했다.

장수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