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세상을 떠난 김정주 넥슨 창업주를 처음 만난 것은 1995년이었다. 서울 테헤란로 오피스텔에 4명이 모여 게임을 개발하던 때였다. 당시 게임 개발은 밥 굶기 좋은 일이었다. 동갑내기로서 측은함과 안타까움에 간간히 방문했고, '바람의 나라'를 만든 모 개발자의 결혼식에도 참석했다.
그때 고인에게 느꼈던 것은 끝 모를 자신감과 낙천성이었다. '잘 되나요'라고 물을 때마다 고인은 빙그레 웃으며 '잘 되겠죠'라고 답해 궁금함과 답답함을 동시에 자아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의 자신감과 결단력에 감탄을 한 일이 있다. 그는 호구지책으로 게임 개발 외에 기업 홈페이지를 만들어 주는 일을 했다. 그때 주요 고객이 현대차였다. 현대차 홍보실 직원은 일을 맡겨 놓고 불안했던지 수시로 넥슨 사무실을 급습했다. 일종의 감시였다. 그렇게 '갑'의 잔소리에 시달리던 고인은 '갑 중에 갑'이던 현대차 직원을 설득해 직원으로 영입했다. 실로 놀라운 결정이었다. 잘나가는 대기업을 버리고 작은 벤처로 옮긴 직원도 대단했다. 그 직원은 지금 넥슨의 지주사 NXC의 대표가 됐다.
그토록 자신만만하고 낙관적이었던 고인의 비보가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불과 얼마전까지 프랑스에서 딸과 스키를 타며 너무 행복했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우울증 치료를 받았다는 말이 더욱 의아했다.
공교롭게 고인의 부고를 접할 무렵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신생기업(스타트업) 대표들을 취재하고 있었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스타트업 대표들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취재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확인한 사례들은 기사로 옮기기 힘들 만큼 심각했다. 공통적으로 직원과 그 가족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부담, 돈을 마련하기 위해 투자를 받고 매출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겪는 스트레스, 예기치 못한 동료들과의 갈등까지 혼자서 감내해야 할 중압감이 엄청났다.
무엇보다 심각한 건 스타트업 대표들은 우울증을 앓아도 알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느 스타트업의 대표가 심리적으로 불안하다고 알려지는 순간, 투자와 거래는 물 건너가고 믿고 따르던 직원들도 회사를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색도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는 대표들이 많았다. 그래도 이런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응원한 스타트업 대표도 있었지만 결국 기사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취재 과정에서 느낀 안전장치문제는 꼭 짚고 싶다. 미국 벤처투자사(VC)들은 스타트업에 투자할 때, 계약서에 투자금 일부를 대표의 정기적 심리 상담과 치료 프로그램을 밟기 위해 사용한다는 조건을 반드시 넣는다. 그들은 대표들이 겪는 정신과 심리 불안을 회사 성장 단계에서 겪는 당연한 과정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는 우울증뿐 아니라 대표의 지나친 자만과 과신도 포함된다. 그래서 미국의 VC들은 '멘털 코치'라고 부르는 전문적 상담가들과 프로그램 목록을 공유한다.
국내에는 이런 장치들이 없다. 벤처투자사 중 유일하게 알토스벤처스가 스타트업 대표들이 원하면 마음돌봄센터에 연결해주고 비용 일부를 대신 부담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그런데 이마저도 조심스러워 스타트업 대표들이 자주 이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스타트업 대표들은 정부 혜택도 받을 수 없다. 정부는 근로복지공단을 통해 300인 미만 업체의 직원들에게 무료로 EAP라는 심리상담 프로그램을 제공하지만 스타트업 대표들은 고용주여서 이 제도를 이용할 수 없다. 정신안정 앱 '트로스트'를 운영하는 휴마트컴퍼니의 김동현 대표는 "심리 상담이 필요한 대표들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없다"며 "제도적 사각지대와 공백을 메울 수 있는 공적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모 스타트업 대표는 VC들이 나서 주기를 원했다. 스타트업 입장에서 돈줄을 쥔 VC들이 가장 힘있는 상대이니 이들이 적극 심리상담 프로그램도 만들고 미국처럼 투자 계약에 명문화하면 좋겠다는 의견이다. 대표의 우울증은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