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가 가려졌지만 격투장에는 혈흔이 낭자하다. 아직 적대의 기운은 날카롭고, 통합의 소리는 공허하다. 초박빙 승부 탓만이 아니다. 직선 대통령 선거가 여덟 번째였는데 횟수를 거듭할수록 성숙은커녕 더 막장으로 갔다.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가, 우리 모두 곱씹어보아야 할 숙제로 남겨졌다. 눈을 돌려 우선 바깥부터 살펴보자.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안보특보였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러시아가 제국의 길로 들어선다면 우크라이나를 삼킬 것이라고 20세기 말에 경고했다. 러시아와 중국이 함께 미국에 맞서게 되거나, 통합된 유럽과 미국의 팀워크가 약화될 때, 유라시아라는 '거대한 체스판'은 흔들릴 거라고 보았다.
몇 년 전 조지아에 간 적이 있다. 아름다운 마을 시그나기에서 보는 코카서스 산맥은 평원 너머로 연이어 달렸고, '농부의 눈물'이라는 오래된 농장의 와인은 이름만큼 인상 깊었다. 사실 겉으로만 평온할 뿐 조지아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2008년 러시아가 코카서스 산맥 중간의 남오세티야를 점령했고, 수도 트빌리시는 목덜미를 꽉 물려버렸다.
우크라이나는 복합적 전장이다. 러시아가 탱크를 앞세워 침공했지만 서방의 뱅크들이 국제결제망의 러시아 라인을 끊으면서 강력한 금융 바리케이드를 쳤다. 유가는 치솟았다. 석유에 붙은 불은 원자재로 번지게 마련이다. 러시아는 디폴트에도 이골이 나 있다. 곧 러시아발 지급불능 통지서와 산유국발 유가 인상 청구서가 날아들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 경쟁이 심화되면서 우리 안보와 경제 환경은 크게 나빠지고 있다. 미중 대립은 글로벌 공급망으로 확대되었고, 한국의 성장 발판이었던 자유무역 시스템은 삐걱대고 있다. 안보는 더 심각한 영역이다. 미국 내에서도 유럽, 중동, 남중국해, 대만, 북한 등 모든 곳에 힘을 투사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논란 중이다. 혹자는 북한을 우크라이나에, 중국을 러시아에 대입해보기도 한다. 북한 급변사태 시 중국이 한반도에 개입할 가능성은 국무부 차관보를 지낸 커트 캠벨도 저서 '피벗'에서 언급하고 있다.
미 연준은 제 갈 길을 가기로 결정했다. 인플레이션이 관리목표선을 뚫자 유동성이라는 저수지 물을 빼기로 한 것이다. 양적 완화는 종료했고, 정책금리도 상당히 올릴 것이다. 2008년 리만 사태 이전에 1조 달러 이하로 유지되던 미 연준의 대차대조표는 늘어난 채권 매입과 화폐 발행으로 지금은 9조 달러에 달한다. 금융위기 진화와 팬데믹 대응에 대략 절반씩 투입되었다. 엄청나게 풀린 달러는 글로벌 유동성 잔치판을 만들었다. 이제는 미국으로 빠르게 회수되면서 각국 증시는 큰 폭으로 하향하고 달러는 강세로 치닫고 있다.
모두 우리 경제에 부담이 크고, 인기 없는 정책을 요구한다. 금리가 오르면 경기가 위축된다. 정부든 민간이든 함부로 빚내기 어렵다. 이제는 달러가 들고나는 속도와 규모, 국채 및 회사채 자금조달 여력 등 글로벌 유동성에 대한 접근성이 국가신용등급과 바로 연계된다. 재정정책도 제약받게 될 것이다. 부동산 버블과 가계부채의 연착륙 여부도 평가기관의 주시 대상이다. 서민들의 비명은 커지는데 수요 공급 양쪽에서 물가압력도 커지니 정책조합도 난제다.
국민이 갈라지면 나라 안팎의 엄중함에 대처할 수 없다. 해법의 난이도는 높은데, 초박빙 대선 결과는 국정의 앞날을 기약하기 어렵게 한다. 진영의 울타리와 밥그릇을 걷어치우고, 차라리 원내 1, 2당이 함께 대연정을 하는 게 어떤가. 이런 발상의 대전환만이 더 민주적이고 더 유능하며 더 통합적인 새 정부를 구성하는 길이다. 시민이 두려울 때만 정치는 바뀐다. 투표는 끝났지만, 시민다움은 쉼이 없는 덕목임을 일깨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