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에 전력공급이 차단되면서 방사능 유출 가능성 우려가 높아진 것과 관련, 원자력 전문가들은 ‘제2의 체르노빌 참사’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 있다. 원자로가 폐쇄된 지 이미 30여년이 흐른 만큼 내부 온도가 낮아진 데다, 냉각수가 충분해 어느 정도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다만 전쟁이 장기전으로 흐를 경우 원전 내부 관리가 어려워져 상황을 악화시킬 거라는 우려는 여전하다.
9일(현지시간) AP통신과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전날 우크라이나 에너지 당국은 “체르노빌 원전 전력망 차단으로 비상 디젤 발전기가 48시간동안 연료를 공급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후 전력 공급이 없다면 원자력과 방사선 안전의 변수를 통제할 수 없어 방사능이 유출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로 인해 1986년 체르노빌 참사가 소환되는 등 전 세계에 핵 공포가 커졌다.
실제 2000년 전면 폐쇄된 체르노빌 원전에는 230㎏의 우라늄이 포함된 폐연료봉이 있다. 연료봉은 최소 15m 깊이 수조에 잠겼고, 연료봉을 식히기 위한 냉각 시스템이 가동 중이다. 현재는 냉각 시스템을 유지시키는 주 전력이 끊기고 48시간 정도 가동되는 발전기로 시스템을 돌리고 있다. 연료봉 온도가 최대 섭씨 800도까지 올라가면 방사능이 유출된다는 게 정설이다.
하지만 원자력 전문가들은 체르노빌 원전 시설의 전력 중단이 방사능 유출로 이어지진 않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미국원자력학회(ANS)는 “정전은 심각한 문제이지만 대중에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스웨덴 방사선안전청 역시 체르노빌 정전이 앞으로 몇 주간은 방사능 유출로 이어지진 않을 거라고 추정했다.
체르노빌 참사가 발생한 지 벌써 36년이나 흐른 만큼 사용후핵연료가 이미 냉각됐고, 냉각수도 충분하다는 게 이유다. 미국 핵 전문가 프랭크 폰히펠 프린스턴대 교수는 “최악의 시나리오로 봐도 원전 냉각수가 모두 마르는 데는 40일 정도 걸릴 것”이라고 진단했다. 마크 웬먼 영국 임페리얼칼리지 런던 핵물질 연구원도 “보관 수조는 매우 깊기 때문에 냉각 펌프가 가동되지 않더라도 물이 증발하는 데 적어도 몇 주가 걸린다”며 시스템을 복구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마련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단순한 정전이 과거의 악몽 재현으로 이어지진 않을 거라는 얘기다.
하지만 포화 속 원전 환경이 점점 열악해지는 점은 문제다. 체르노빌 원전은 지난달 25일 러시아군의 수중에 넘어갔다. 희박하게나마 있을 위험을 막기 위해선 원전 상황을 지속적으로 점검해야 하지만, 러시아군이 꽁꽁 닫아둔 문을 열 가능성은 크지 않다. 독일 공영방송 도이체벨레는 “전력 차단으로 발전소 내 환기 시스템에 문제가 생기면서 방사능을 포함한 먼지 관리가 어려워지는 부차적 문제도 생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원전 내 핵물질 상태를 점검하는 원격 모니터링 통신이 두절된 탓에 내부 상황을 좀처럼 알 수 없다는 점도 우려를 키운다. 전날 체르노빌 원전 감시 시스템이 끊긴 데 이어 이날 유럽 최대 규모인 우크라이나 남동부 자포리자 원전에서도 통신이 두절됐다. 공교롭게도 두 곳 모두 러시아군이 손에 넣은 곳이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통신 두절은 즉각적인 위협이 되지는 않지만, 방사선 수치 상승을 감지하거나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빨리 결정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러시아군이 원전 내 핵 물질들을 악용해도 알 수 없다는 의미기도 하다. 라파엘 그로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은 이날 “러시아군이 점령한 원전 2곳에서 핵물질 관련 데이터가 갑자기 차단된 것을 우려한다”며 “두 곳에는 많은 양의 핵물질이 사용후핵연료나 신규핵연료 등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