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남동부 항구도시 마리우폴을 포위한 러시아군이 급기야 산부인과ㆍ어린이 병원에까지 폭격을 감행했다. 인도주의 시설인 병원을 공격했다는 점도 충격이지만, 거동이 힘든 임산부와 투병 중인 연약한 어린이를 겨냥한 잔혹함에 국제사회는 경악했다. 동부 돈바스 지역 러시아계에 대한 우크라이나 정부의 학살을 막겠다는 명분으로 침공한 러시아가 정작 ‘전쟁범죄와 집단학살을 자행하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진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또다시 세계를 향해 “함께 싸워 달라”고 절박하게 호소했다.
주요 외신에 따르면 10일(현지시간) 마리우폴 시의회는 “전날 러시아군이 수차례 공습한 산부인과ㆍ어린이 병원에서 여자아이 1명을 포함해 3명이 숨졌다”고 밝혔다. 부상자는 최소 17명으로 집계됐다. 소방대는 건물 잔해에 어린이들이 다수 매몰된 것으로 보고 필사의 구조작업을 펼치고 있다. 희생자가 더 늘 가능성도 적지 않다. 로이터통신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 가장 참혹한 사건”이라고 짚었다.
이번 공습은 러시아군이 민간인 대피를 위해 12시간 동안 휴전하기로 약속한 시간대에 발생하면서 공분을 키웠다. 마리우폴 시의회는 “아이들이 치료받던 병동이 완전히 무너져 피해가 막대하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 내부무가 공개한 폭격 현장은 처참하다. 포탄이 떨어진 앞마당에는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고, 차량들은 잿더미가 됐다. 병동 창문은 폭발로 모두 뜯겨져 날아갔다. 내부는 부서진 집기들로 아수라장이 돼, 병원이었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만삭인 배를 감싸 안고 대피한 피투성이 임산부, 들것에 실려가는 환자, 아픈 아이를 끌어안고 울먹이는 부모 등 살아남은 사람들은 공포에 떨고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어린이 병원과 분만실이 러시아에 무슨 위협이 되었나. 러시아는 대체 어떤 나라냐”며 절규했다. 이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향해 “살인을 멈춰라. 당신은 힘이 있지만 인간성을 잃었다”고 성토했다. 그러면서 “세계는 얼마나 더 오래 이 잔혹 행위를 묵인할 것인가. 당장 하늘 문을 닫아달라”며 러시아군의 공습을 막을 수 있도록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해야 한다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ㆍ나토)에 요청했다.
전쟁 시 인도주의 기준 등을 정립한 제네바 협약에선 병원 등 의료시설을 의도적으로 공격하는 행위를 전쟁범죄로 규정해 금지하고 있다. 러시아는 이 병원을 조준 폭격했다. 마리아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이 “우크라이나가 마리우폴 병원에 전투 기지를 마련했다”고 말한 후 공습이 단행됐다는 점이 그 증거다. 미국 CNN방송은 “폭격 이후 촬영된 영상은 환자와 의료진이 병원에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며 “러시아의 주장은 아무 근거가 없다”고 비판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러시아의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 의료시설과 의료진을 향한 공격 행위 18건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사망자는 10명, 부상자는 16명에 이른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병원을 우선 공격 목표로 삼는 것은 러시아의 오랜 군사 전략이다. 생존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어 주민들을 이탈시키고 지상군의 진격을 용이하게 하는 수법이다. 병원을 공격함으로써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다는 공포심을 극대화하는 효과도 노린다. 시리아 내전에서도 러시아군은 병원에 대한 무차별 공습으로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았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번 폭격을 “집단학살(Genocide)이 자행되고 있는 증거”라고 규정했다. 세르히 오를로프 마리우폴 부시장도 “명백한 전쟁범죄”라고 비판했다. 국제사회도 공분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은 “무고한 민간인에 대한 야만적인 폭력”이라고 규탄했고, 유엔인구기금(UNFPA)과 유엔아동기금(UNICEF)도 “국제 인도주의 법에 따른 의무를 존중하라”고 촉구했다.
열흘 가까이 고립된 마리우폴은 ‘인도주의 재난’ 상태다. 현재까지 주민 1,300여 명이 숨졌다. 시당국은 거리에 시신이 나뒹굴고 있어서 미처 신원 확인도 못 한 채 한꺼번에 매장하고 있다. 가까스로 도시를 빠져나온 한 주민은 “가족 중 누군가가 죽으면 손과 발을 묶어 밖에 내놓고 천으로 덮어두라는 시당국의 지침을 받았다”면서 관련 문자메시지를 미국 뉴욕타임스에 내밀었다. 포탄을 피한 주민들도 위태롭긴 마찬가지다. 물과 식량이 없어 죽어 가고, 분유가 동나 갓난아기 3,000명이 굶주리고 있다. 오를로프 부시장은 “얼마 전 눈이 내려 주민들이 행복해 했다”며 “장작불에 눈을 녹여 물을 마실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비통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