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귀여워서 그러는 게 아니라

입력
2022.03.10 15:00
21면
키티 크라우더 '개를 원합니다 - 어떤 개든 상관없음'

편집자주

그림책은 ‘마음 백신’입니다. ‘함께 본다, 그림책’은 여백 속 이야기를 통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마음을 보듬어 줄 그림책을 소개합니다. 어린이책 기획자이자 그림책 시민교육 활동가이기도 한 신수진 번역가가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밀리는 개를 기르고 싶다. 힘이 센 개든, 털이 긴 개든, 장난꾸러기 개든, 우스꽝스러운 개든 상관없다. 방 안에는 개 인형이 열 마리도 넘게 있고, 슬리퍼에도, 이불에도, 액자에도, 컵과 소금·후추통에도 온통 개가 그려져 있지만 '진짜 개'가 필요하다. 매일 아침 애걸복걸이지만 엄마는 "안 돼. 안 돼" "내 강아지는 너야!"라고 대답할 뿐이다.

밀리는 왜 이토록 간절하게 개를 원하는 걸까. 그리고 학교 가기는 또 왜 이렇게 싫어하는 걸까.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밀리는 초일류 사립학교인 '세 겹 왕관 학교'에 다니는데, 무리 지어 몰려다니는 덩치 크고 화려한 아이들은 늘 자기네 개 이야기뿐이다. 밀리는 도무지 거기에 끼지 못한다. 이번 일요일 오후에는 개를 데리고 함께 만나자며 신이 난 아이들을 뒤로 하고 집으로 오면서, 밀리는 화가 나는 걸 넘어서서 슬퍼서 견딜 수가 없다. 침대에 파묻혀 엉엉 우는 밀리를 보고 엄마도 이쯤이면 눈치를 챘을 것이다. 개를 그냥 귀여운 인형처럼 생각해서 기르자고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엄마와 함께 찾아간 유기 동물 보호소에는 그동안 밀리가 꿈에 그려 왔던 멋진 개들이 많다. 버려진 개들은 기운 없고 시무룩한 표정이지만, 호기심 어린 눈길로 바라보기도 하고 씨익 웃어 주는 개도 있다. 크고 작고 멋지고 귀엽고 쾌활한 이 개들 중에 누가 밀리의 개가 될까? 키티 크라우더 특유의 강렬하고 씩씩한 필치로 그려진 개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면서 내 마음도 왠지 콩닥콩닥거렸다. 와, 다 멋있잖아!

그런데 밀리가 선택한 개는 뜻밖에도 구석에서 쓸쓸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작고 쭈글쭈글한 개다. 왜 하필? 글쎄, 인생에서 중요한 만남을 생각해보면 '우연' 혹은 '마법'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 더 많지 않을까.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더더욱 그렇다. 우리 집 고양이 마르코는 2년 전 한겨울에 길거리를 떠돌다가 나에게 왔는데, 이동장 안에서 튀어나오면서 "와앙!" 울던 순간, 저 비쩍 마른 녀석을 다른 데로 보내지 못할 것임을 직감했다.

아무튼 밀리와 개는 서로가 마음에 든 모양인데, 엄마는 어째 탐탁지 않아 보인다. "이 나이 든 개가 어떤 품종인지"가 엄마의 첫 번째 궁금증인데, 보호소 아저씨는 많이 들어본 질문이라는 듯 "여러 종이 섞였을 텐데(…) 개들의 신만이 아시겠지요"라고 평온한 얼굴로 답한다.

밀리는 개에게 '프린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고(이 말에 개가 활짝 웃으며 반응했기 때문이다) 씻겨 주고 먹여 주고 함께 책도 읽는다. 그리고 드디어 밀리도 자기 개를 앞세우고 일요일 오후 파티에 가는데… 아이들은 어른들의 와인 파티를 흉내낸 듯 손에 손에 붉은 석류 주스를 들고 커다란 리본이나 장식으로 멋을 낸 개들을 데리고 나왔다. 밀리는 의기양양하게 이 무리에 끼려고 했지만, 프린스는 단박에 잡종, 난쟁이라고 놀림받으며 웃음거리가 된다. 밀리는 모욕감을 견디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프린스에게 당장 나가라며 화를 낸다. 프린스는 고개를 떨군 채 떠난다. 이런 일이 별로 당황스럽지도 않다는 듯이.

혼자 남겨진 밀리는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에 퍼뜩 정신이 든다. 빗속을 헤매며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프린스는 바들바들 떨며 다가온다. 이때부터 둘은 진정으로 하나가 된다. 이제 밀리는 프린스에게 커다란 리본 장식 같은 것을 매달지 않는다. 오히려 밀리의 리본이 프린스의 털 색깔과 같은 색으로 바뀐다.

산책길에서 둘이는 웬 멋쟁이 할아버지를 만나는데 그분은 프린스가 "태평양의 어느 작은 섬에만 있는 희귀한 개"라면서 치켜세우더니 밀리에게 속삭인다. "이 개가 아가씨에게 말을 합니까?"

음, 그런데 사실 모든 개는 말을 한다! 한국말이나 프랑스말이 아니어서 그렇지. 밀리가 프린스와 대화를 나누면서 더 이상 다른 아이들에게 잘 보이려 할 필요가 없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것은 프린스가 정말로 말할 줄 아는 개여서였을까?

좀처럼 감정의 교류를 해주지 않는 바쁜 엄마, 친구도 없이 겉도는 학교 생활 속에서 간절하게 자신을 바라봐 줄 누군가를 원했던 밀리는 이제 프린스를 통해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며 성장할 것이다. 조건 없는 사랑과 환대의 경험, 돌봄의 보람과 괴로움, 그리고 다가올 이별을 준비하고 겪어내는 것까지….

개를 기르는 시인들이 함께 엮은 시집 '나 개 있음에 감사하오'에서 박시하 시인은 "덕분에 세상을 보는 창이 밝은색 필터를 씌운 것처럼 환해졌다"고 말했다. 밀리가 프린스와 함께 달려 나가는 장면은 바로 그 말처럼 눈부시게 환한 빛으로 가득하다.


신수진 어린이책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