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지금 나왔습니다. 그나마 국민을 이해하는 사람을 찍어야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제20대 대통령선거 본투표가 치러진 9일, 서울 중구 필동주민센터에 마련된 필동 제1투표소에서 오후 3시쯤 투표를 마치고 나온 이모(63)씨는 한국일보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대선후보들의 비전 대결보다는 여야 양측의 네거티브로 얼룩진 '비호감 대선'이란 평이 주를 이뤘지만 참정권을 행사하려는 시민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같은 투표소에서 만난 김형자(62)씨는 "이번엔 투표하고 싶지 않았는데 나중에 대통령 욕이라도 하려면 투표는 해야할 것 같아서 나왔다"고 밝혔다.
이날 서울 25개구 투표장에선 차분한 분위기 아래 투표가 이어졌다. 사전투표를 포함한 전국 투표율은 오후 6시 현재 75.7%로 집계됐다. 2017년 19대 대선 때보다 3%포인트 높은 수치다. 코로나19 오미크론 변이 확진자가 폭증하고 있지만, 시민들은 질서 있게 투표에 참여하며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피력했다.
서울 투표율은 76.8%로 전국 평균을 상회했다. 19대 대선과 비교했을 때 야당세가 강한 선거구의 투표율이 증가하는 경향성을 보였다. 여당세가 강한 선거구는 투표율이 비슷하거나 약간 낮게 나타났다. 더불어민주당 지지층보다 국민의힘 지지층이 조금 더 결집하는 양상을 보이는 것으로 풀이된다.
19대 대선에서 서울 25개구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에게 가장 많은 표를 보냈던 마포구의 투표율은 77.5%로 서울 평균보다 0.7%포인트 높았다. 서울 평균 대비 1.6% 포인트 높았던 지난 대선 투표율에 비해 격차가 줄어든 셈이다. 문 대통령을 두 번째로 많이 지지했던 관악구의 투표율은 75.0%로 서울 평균보다 1.8%포인트 낮았다. 19대 대선 관악구의 투표율은 서울 평균과 거의 같았다. 여당 강세 지역인 강서구도 19대 대선보다 투표율이 저조하게 나타났다. 서울에서 투표율이 가장 낮은 강북구(72.5%) 금천구(73.5%) 중랑구(73.6%)는 모두 여당 강세로 분류되는 곳이다.
반면 지난 대선 때 문 대통령 지지가 가장 낮았던 강남구의 투표율은 76.8%로 서울 평균과 일치한다. 19대 대선 때 강남구 투표율은 서울 평균보다 낮았다. 강남구와 서초구 다음으로 문 대통령 득표가 저조했던 용산구의 투표율은 74.9%다. 전체에서 5번째로 낮은 투표율이지만 지난 대선 때보단 높게 나타났다. 야당 강세지역인 송파구의 투표율은 84.4%로 서울 평균을 7.6%포인트 웃돌았다. 서초구 투표율도 78.6%로 전체 2위다.
'민주주의의 축제'라는 선거지만, 시민들 표정은 밝지만은 않았다. 대선이 각종 네거티브 캠페인으로 얼룩진 탓에 냉소적 입장을 내비치는 유권자가 많았다. 중구 충무로에서 커피숍을 운영 중인 20대 김모씨는 "대선 TV토론을 다 보고 공약도 다 살펴봤다"며 "결과적으로 나와 맞는 사람이 없어서 백지로 투표했는데 새 대통령이 그 의미를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관악구 대학동 제1투표소에서 투표한 박모(36)씨는 "대선후보가 둘 다 별로라고 생각한다. 기대되는 건 하나도 없다"며 "세금 많이 떼고 이상한 정책만 안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프리랜서 나모(31)씨는 "투표하는 마음이 좀 심란하다. 다들 뽑을 사람이 없다고 하던데 누가 되든 집값이나 좀 내려줬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서대문구 신촌동 제3투표소에서 가족과 함께 투표한 주부 신모(61)씨는 "역대 선거와 비교했을 때 후보들이 아쉬운 건 사실"이라면서도 "경제를 회복하고 사회를 정상적으로 돌리는 게 중요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지지 후보를 밝힌 '소신파' 유권자도 있었다. 동작구에서 투표한 박용현(63)씨는 "이번엔 일을 정말 소신껏 잘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았다"면서 "대통령이라면 다방면에 지식이 있어야 한다. 뚜렷한 비전 없이 정권교체만 얘기하는 후보는 뽑지 않았다"고 말했다. 반면 신촌에서 투표를 한 여대생 김모(26)씨는 "정권 교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문재인 정부가 잘 했으면 모를까, 만족스럽지 않다"며 "특히 부동산 정책이 실패하지 않았느냐"고 지적했다.
시민들은 다만 높은 투표율엔 긍정적 의미를 부여했다. 중구 회현동 제1투표소에서 만난 최모(73)씨는 "아무리 정치가 미워도 결국 삶을 바꿔줄 수 있는 건 정치 아닐까"라며 "거기에 희망을 걸기 때문에 투표율이 높은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강남구 신사동 제4투표소에서 투표한 박모(58)씨는 "사람들이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 같아서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했다. 김모(29)씨는 "누가 되든 공정하고 투명하게 나라를 운영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